- 스키여행을 떠난 아내와 딸이 탄 버스가 절벽에서 추락했다. 아내는 죽고 딸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런 줄 알았다. 아내의 영혼이 딸의 몸에 빙의했다. 딸의 육체를 가진 아내와 함께 살게 된 남자의 딜레마. 내가 사랑하는 저 이는 아내인가 딸인가.

- 대가의 소설답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전개와 문장. 이 동화같은 설정을 편견없이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러고는 막판에 놀라운 반전. 판타지로 빗대어 생각하게 만드는 복잡한 현실의 많은 문제들. 이를테면.

- 사랑한다는 건 무엇인가. 그이의 정신을 사랑하는 것을 뜻하나. 그이의 육체는 그저 고귀한 정신을 담는 그릇일뿐인가. 그것이 가능한가. 사랑하지만 안을 수 없어서 나는 외롭고, 그런 저이가 다른 파트너(로 보이는)와 함께 있는 모습만 봐도 질투로 숨이 넘어갈 듯 괴롭다.

- 육체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이룰 수 없는 순간 등장한 다에코. 하지만 그녀의 존재에 열정이 살아나는 걸 느껴도 나오코를 배신할 수는 없는 것. 결국 다에코는 자위할 때 상상속 섹스파트너의 존재로 머물 뿐.

- 다시태어난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묻는 이야기. 공부도 운동도 최선을 다하는 다시 태어난 나오코-모나미의 모습.

-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405쪽) : 운전기사 오가와의 비밀과 반전. 그 길에 목숨을 바친 결과 새롭게 피어나는 사랑. 오가와의 전부인이 이쓰미를 돕게 되다.

- 마지막 반전의 의미. 딸로 돌아온 것처럼 연기한 나오코? 자신이 꿈꾸는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아빠-남편에게서 온전히 독립할 수 있어야 함을 깨달았던 것. 그래서 헤이스케에게는 잔인하지만 '딸'로 변신하기로 결심. 실행. 나오코는 이기적인가? / 헤이스케는 그냥 희생한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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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기행, 기억투쟁의 현장을 찾아


설렜다. 오래 전 도쿄와 오키나와에 갔던 건 모두 업무상 출장이었다. 이번이 내 생애 첫 해외여행인 셈이다. 여권도 새로 만들고 인터넷시대 해외여행 필수품이라는 ‘도시락’이 뭔지, 어떻게 쓰는지 부러 찾아 공부도 했다. 설렜지만 부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여행이 아니라 강제징용노동자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역사기행 아닌가. 군함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찾아보았고 한수산의 소설 『군함도』를 미리 읽었다. 설렘과 부담으로 가득한 가슴을 안고 나는 2018년 1월 19일 아침 6시 반 인천공항을 출국장을 찾았다. 겨레하나여행사업단 더하기 휴가 기획하고 북녘어린이영양빵공장 사업본부가 주최한 ‘일본큐슈 강제징용노동자 역사기행’ 참가자들이 모여있는 M카운터 앞으로.


국립원폭자료관과 나가사키평화자료관

온화하고 쾌청한 날씨에 솜털 같은 구름 위를 날아 순항한 비행기는 10시 30분에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공항 활주로 한편에 줄지어 서있는 자위대 군용기와 격납고였다. 구름처럼 들떠 있던 마음이 착 가라앉고 허리가 꼿꼿이 펴졌다. 거리가 가깝고 온천이 유명한 여행명소 후쿠오카는 한국관광객 뿐만 아니라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를 꿈꾸는 일본 자위대에게도 관문이었다.

일행의 도착시간에 맞춰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던 29인승 버스에 올랐다. 큐슈 서쪽 해안가 고속도로를 타고 남서쪽으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창밖 풍경을 바라보니 곳곳에 대숲이 있고 가로수로 심어진 상록활엽수에 붉은 꽃이 매달려 있다. 공항에서 빌린 와이파이 데이터로밍 단말기 ‘도시락’을 켜고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해보니 애기동백꽃이다. 후쿠오카 현의 상징 꽃이란다. 인천은 지금 대한의 강추위가 한창인데 제주와 비슷한 아열대기후에 속한 일본 남부 큐슈는 봄을 부르는 따뜻한 날씨다. 

2시간 여를 달린 후 나가사키에 도착해 먼저 들른 식당에서 현지 가이드 역할을 해주실 기무라 히데토 선생을 만났다. 재일 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모임에서 활동가로 역할을 하고 계신 분이다. “반갑습니다. 저는 나가사키 출신인 저는 백제인의 후손일 겁니다. 고향을 떠나 일본에 와서 산지 너무 오래되어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점, 여러분께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유창한 한국말 솜씨도 대단한데 재치 있고 겸손하기까지 하다. 모두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시작부터 자위대 항공기를 보고서 뻣뻣해졌던 내 등허리도 좀 나긋나긋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밥을 먹은 다음 먼저 국립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에 도착했다. 이곳은 폭심지다. 1945년 8월 9일 미군이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폭이 이곳 원폭자료관과 인접한 평화공원 하늘위에서 폭발했다. 희생자를 추모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취지로 1955년에 일본정부가 설립한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폐허 사진과 자료로 가득하다. 곳곳에 배치된 전시물들은 일관된 메시지를 전한다. “핵무기 없는 세계, 영구적인 평화실현” 옳은 말이다. 그런데 뭔가 공허하다. 기무라 선생이 그 공허함의 실체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원폭 투하로 일본인 7만 3천명이 죽었고, 강제징용으로 끌려와 일하던 조선인도 1만 명가량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그 사실을 제대로 밝히지 않습니다. 피폭당한 부상자들에 대한 지원에서도 차별을 해왔습니다. 조선인 피폭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동안 이루어져왔던 의료지원도 그 즉시 중단해버렸습니다”

다음으로 돌아본 평화공원의 상징물, 평화기념상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레슬링 선수같은 강건한 남성의 육체미를 형상화한 평화기념상은 ‘힘에 의한 평화’를 꿈꾸는 군국주의의 야욕을 바탕에 깔고 있어보였다. 어디에도 반성은 없었다.

속상하고 분한 마음은 다음 행선지인 나가사키평화자료관을 둘러보고 풀어졌다. 국가시설로 지어진 원폭자료관에 비하면 자료의 양과 시설의 규모면에서 구멍가게 수준이지만 이곳에는 진실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조선인 피폭자의 참상을 조사하고 알리기 위해 평생을 바친 양심적인 일본인 오카 마사하루의 유지를 받들어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의 주도로 1995년에 개관했다. 일본정부의 지원을 일체 받지 않고 일본 시민과 교포들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이곳에는 강제징용당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사진과 피해자료가 빼곡하다. 입구에 이곳을 찾은 일본 학생들이 보내온 문집이 수십 권 쌓여있다. ‘일본이 가해한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이제껏 몰랐는데 여기에 와서 처음으로 알고 배우게 되었다’는 내용이 진실하고 담백했다. 

숙소에 차려진 저녁을 먹은 후 인천팀만 따로 방 하나로 모여 뒤풀이를 했다. 다들 모처럼의 해외여행인지 이국에 온 감흥도 작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에 와서 보니 작은 공사를 해도 사람을 여럿 붙이더라. 한국이면 혼자서 다할 보도 정비 일을 운전사, 신호수, 기술자 세 명이서 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LED간판 홍수를 이루는 한국에 비해 일본의 간판은 소박하고 멋스럽다. 작은 상점의 인테리어도 값싼 자재보다는 원목을 써서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과거를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 더 좋은 삶을 세심하게 추구하는 일본. 낮에 들른 두 자료관의 대비처럼 모순된 일본의 두 얼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첫날은 이렇게 저물어갔다.


군함도에 가다

다음날 아침 일찍 군함도 유람선을 타러 나가사키 항으로 갔다. 맞은편 바다에 조선소가 보인다. ‘일본의 삼성’ 미츠비시 중공업의 나가사키조선소. 조선인 징용노동자 수 백 명이 일하던 곳이다. 그 뒤편 야산에 조선인들의 기숙사가 있었고 이들은 일터까지 6킬로미터를 걸어서 출퇴근을 했다. 고된 노동을 마치고 산고개를 넘어갈 때면 저절로 아리랑 가락이 흘러나왔을 그 고개의 이름이 ‘아리랑고개’라고 붙었다고 한다. 일행을 태우고 출발한 배가 조선소 바로 앞을 지나쳤다. 공항에서는 자위대 비행기가 보이더니 이 조선소에서는 자위대 군함을 한창 건조하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이 자랑했던 전함 무사시가 여기서 만들어졌다. 70여년 세월이 흘러도 일본은 달라진 게 없다. 조선인을 강제 동원해 전쟁무기를 만들던 그곳에서 여전히 그들은 전쟁무기를 건조중이다. 떳떳하지 못하니 침략의 과거에 대해 진심어린 반성이 안되는 것이다.

10시 반경 군함도에 도착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책과 사진, 모형으로 여러 차례 봐왔던 섬이었지만 막상 보니 느낌이 남달랐다. 종단 길이 480미터, 해안선 길이 1.2킬로미터. 인천앞바다에 있는 작약도와 거의 비슷한 크기의 작은 섬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인들은 800여명이 끌려와 121명이 숨졌다. 갱도에 깔려죽고 굶어 죽고 병걸려 죽고 물에 빠져 죽었다. 도망갈 곳 없는 좁은 섬에 갇혀 그들은 얼마나 외롭고 춥고 막막했을지 상상이 갔다. 일행을 잠시 모이게 한 장수경 집행위원장이 말했다. “이곳에서 일하다 돌아가신 강제징용 노동자들을 생각하며 묵상하겠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지만 최소한 그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 기억하는 일이 투쟁이다. 기억투쟁이다. 기무라 선생이 자신의 선조들이 저지른 과오를 어떻게든 일깨우려 노력하는 이유도, 양심적인 일본 지식인들과 재일 조선인들이 과거를 바로 잡으려 분투하는 이유도, 우리가 군함도까지 찾은 이유도 한가지다. 승리자/가해자의 관점이 아닌 당사자/민중의 관점으로 진실을 지키는 일은 기억하는 데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군함도의 만행을 덮으려고 하는 자들 또한 잘 알고 있다. 우리 일행은 군함도에 도착해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 함께 들 펼침막조차 꺼낼 수 없었다. 우리를 싣고 온 배의 선장이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방해하고 문제 삼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배에 오르며 다시 보니 배 이름이 竹島丸 (다케시마마루, 죽도(독도)호)였다. 우리로 치면 유람선 이름을 ‘독도수비대’쯤으로 지은 셈이다. 열정이 넘치는 우익인사인 모양이다. 투쟁은 이렇게 현재진행형이었다.

시내로 돌아와 나가사키 짬뽕의 원조라고 하는 중식당에 가 점심을 먹고 3일차 일정을 위해 기타큐수로 이동했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지역별로 자유롭게 식당을 찾아 저녁을 먹었다. 마침 이 날이 내 생일이라 조금 무리지만 기분을 내기로 했다. 선후배 동료들이 조금씩 갹출해 스시안주에 술을 마셨다. 일본에서는 소주가 독주에 속하는지 얼음을 채운 글라스에 딸아 마시는 모양이다. 우리 일행이 소주를 병째 시킬 뿐만 아니라 얼음 없이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모양을 보고 젊은 식당 종업원이 놀라 자빠질 뻔했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 잘 안되는 영어와 일본어로 농을 했다. 토요일 저녁인 만큼 술집마다 젊은 취객들이 그득했다. 낮의 긴장이 또 풀어지고 우리와 너무 닮은 그들이 정겨웠다.


야하타제철소, 휴가 묘지

셋째 날 아침 10시에 야하타제철소 앞에 도착했다. 1901년에 청일전쟁에서 이겨 받은 배상금으로 완공한 곳으로, 태평양 전쟁까지 일본 철강 생산량의 절반을 담당했던 곳이다. 현재는 신일본제철이 운영하며 조선인 징용노동자들이 노역에 투입되었던 최초의 고로는 군함도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기념시설로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다.

제철소 출입구 앞에서 배동록 선생을 만났다. 제철소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해온 걸개그림과 사진첩을 바닥에 펼쳐놓고 본인 소개를 먼저 했다. “저는 경남 합천에 거주하다 강제징용된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교포 2세입니다. 여기 제철소에서 거친 일을 하며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일본학교를 돌면서 강제징용의 역사와 한일관계에 대해 강의하고 있습니다. 제철소가 유네스코에 등록되었는데 조선인 얘기는 한마디도 없습니다. 노예처럼 맞으면서 일했던 우리 부모님 얘기가 없습니다.”

선생의 설명을 듣고 돌아보니 군함도와 꼭 같았다. 메이지시대 일본의 산업혁명을 이끈 자랑스런 중심지라는 얘기만 있을 뿐, 전쟁물자 징발하듯 조선에서부터 사람들을 끌고 와 노예처럼 부려먹다 죽음으로 몰고 갔던 자신들의 검은 역사에 대해서는 이곳 제철소에서도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배선생과 함께 일정을 동행해준 동생 내외분에게서 선물을 받았다. 두 사람은 우리 일행 사람 수대로 미리 준비한 음료수를 해 나눠주더니 청소년 참가자 2명을 따로 불러 세뱃돈까지 안겨주었다.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은 저분들인 것 같은데 오히려 우리가 받기만 했다. 인간적인 존엄을 잃지 않고 가장 힘든 시간을 통과해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기품과 여유인 것일까, 가슴이 뭉클했다.

야하타 제철소 인근은 지쿠호라 불리는 후쿠오카 현 중앙지역으로 일본 최대의 탄광 생산지였다. 조선인 강제연행 노동자들도 15만 명이나 동원되어 하루 12시간이 넘는 가혹한 강제노역에 투입되었고 희생당했던 곳이다. 그렇게 동료들이 죽어 가면 제대로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돌 한 덩이만 올려놓고 매장한 경우가 수없이 많았다. 다음 행선지인 무궁화당은 이렇게 쓰러진 조선인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무연고 유골 140구를 모신 납골당이다. 나가사키보다 북쪽으로 올라와서인지, 전날보다 훨씬 추워진 날씨에 옷깃을 여미며 엄숙하게 추도당을 참배했다. 

점심을 먹고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휴가 공동묘지였다. 휴가(日向)집안의 묘지였다가 현재는 이 마을 공동묘지인 곳이다. 무궁화당에서 설명을 들은 그대로였다. 탄광에서 죽도록 일하다가 숨을 거둔 조선인들은 장례를 치를 시간도, 묘석을 쓸 돈도 없었다. 봉분 없이 평매장을 한뒤 발길에 채이는 보타(ボタ, 폐탄) 몇 덩이를 올려놓고 무덤 표식을 했다. 충격적인 것은 이 묘지 입구에 개와 고양이 묘가 잔뜩 있다는 점이다. 죽어서조차 사람대접을 못 받는 비극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묘지 중간 나무 둥치에는 ‘광주’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배 선생에게 여쭈었더니 “광주 정대협에서 종군위안부 피해 여성 일곱분이 오신 적이 있었는데, 저 묘역을 보고서 ‘아이고~ 내가 이 꼬라지 보려고 예까지 왔는가’하며 통곡을 하신 다음 칼로 새겨 놓은 것”이라 한다. 배 선생의 설명을 듣고 절을 하고 묵상을 하며, 선생도 우리도 눈물을 흘렸다. 

움직이지 않는 고통스런 과거가 우리 가슴을 저며 낼 뿐이라면, 상처난 가슴에 새살이 돋게 하고 평화의 꿈을 꿀 수 있게 만드는 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노력과 연대일 것이다. 배선생을 도와 일행과 함께 무궁화당과 휴가묘지를 돌아봐 준 젊은 재일 조선인 활동가 이대미 선생의 작별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저는 재일교포 3세로 대학까지 민족학교를 졸업해 현재는 청년운동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바다를 건너 한국에서 오신 분들을 만나면 정말 든든합니다. 날로 탄압이 거세지는 일본이라서 우리도 더 힘이 필요한 때입니다. 여러분을 만나니 더 열심히 해보자는 용기가 생깁니다. 함께 파이팅합시다!”


한국과 일본은 멀고도 가까운 이웃이다. 오랜 시간 서로 교류를 하며 꽃피운 문화도 많고 음식도 많다. 돌아오는 날 우리는 점심으로 ‘텐진호르몬’을 먹었는데 일종의 막창구이였다. 자신들이 먹지 않는 소나 돼지의 창자를 조리해 맛있게 먹는 조선인들을 보고 생겨난 요리라고 한다. 짬뽕이나 단무지도 한-일 인적교류에서 비롯된 음식이라 할 수 있다.

긴 세월 이웃하며 살아온 한국과 일본. 최근 겪었던 큰 싸움에서 저지른 명백한 잘못을 사과하는 것이 새롭게 호혜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첫발자국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그렇다고 과거의 반성만 요구하느라 현재 할 수 있는 일을 미룰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궁화당을 참배하고 들른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때였다. 미남자에다 친절한 성품까지 겸비한 김혁민 인천겨레하나 사무처장이 한쪽 구석에 앉아 싱긋거리는 게 눈에 띄었다. 옆 좌석에 일본인 가족이 식사를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김 사무처장은 그 가족의 젖먹이 아기랑 까꿍 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함박웃음에서 환한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미래는 저렇게 맞이해야 하는 것이겠구나, 생각했다. 서로를 향한 순수한 관심과 호의로 다가서기. 이번 강제징용 역사기행을 통해 얻은 또 다른 교훈이었다.




Posted by 나무72

영화 아가씨의 원작소설. 책과 영화를 모두 섭렵한 친구의 권유로 읽었다. 

케이블 방송에서 틀어주던 영화를 앞부분만 여러차례 보다 잠든게 여러번이다. 이정재와 김태리, 김민희가 스타카토 처럼 경쾌한 목소리로 음모를 꾸미는 도입부가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남았다. 1부는 쉬 진도가 나가지 않았는데,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19세기) 런던의 풍물에 대한 묘사와 인물들에 대한 서술방식이 익숙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아가씨의 세 주인공이 자꾸 떠올라, '그렇고 그런 이야기겠구먼, 뒤에 또 뭐 새로운 이야기가 있을라고'하고 큰 기대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인공 수가 모드 대신에 정신병원에 갖히는 결말로 1부가 마무리 된 것이 충격적이었다. 뭐야 이거. 세상에. 완전히 뒤통수 맞았네. 큰 기대도 없었으므로 그 어떤 스포일러에도 노출되어 본 적이 없었던터라 더 놀라웠다. 그 때부터 읽는데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2부는 동일한 이야기를 또다른 주인공 모드의 시점에서 풀어가는 완전히 같고도 다른 이야기다. 수와 모드의 감상과 느낌은 기이하게도 닮고도 달랐다. 왜 그런지 그 비밀은 3부에서 비로소 풀리게 되는데, 나는 이런 스토리를 창조해낼 수 있는 인간의 위대함에 놀라울 뿐이었다. 저자 이름, 사라 워터스란다.

3부에서는 모든 사건과 줄거리가 수렴된다.  사랑은 불타올랐다가 배반당하고, 내 것인줄만 알았더니 함께였으며, 탄생과 죽음이 나란히 온다. 

Posted by 나무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