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스텐 두세 (지은이),박제헌 (옮긴이), 세계사, 2021

J의 추천으로 읽다.

마피아의 자금세탁과 회계관리를 도맡아 해주며 거액의 보수를 받는 변호사 비요른이 주인공. 어쩌다 보니 자기가 모셨던 마피아 보스를 살해하게 되고, 의도치 않게 휘말려버린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다른 마피아들까지 죽이게 되는 스토리.

악당의 합법적 외연을 관리해주는 법기술자로서의 변호사. 한국 느와르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익숙한 설정이라 그런지 상황이 쉽게 공감이 갔다, 일단은. 문제가 생겼을 경우 대개 그런 변호사는 주인공 악당만큼이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전개가 또한 익숙한데, 이 소설에서는 거꾸로다. 차악이 거악을 징계하는데 성공한다. 변호사 출신 저자가 의도한 비현실성이었겠지.

현대 독일문학을 거의 접해보지 않았지만 왠지 철학적이고 고루할 것 같은 편견이 있었나보다. 엄청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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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삶의 궁극적 목표가 삶 자체라는 것을 믿었다. 날이나 시간은 그 자체로 목적이지, 다른 날이나 다른 경험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목표란 하나의 꿈이며, 그런 목표들에 대한 믿음은 하나의 치명적 환상이라고 그는 믿었다. 현재를, 혹은 가까이 있거나 예상할 수 있는 미래를 이 먼 목표 때문에 희생시키는 것은 언제나 인간 희생의 잔혹하고 쓸모없는 형식으로 이끌지 않을 수 없다고 그는 믿었다.가치들이란 비인격적이고 사물적인 영역에서 발견되는 게 아니라, 인간존재에 의해 창조되고 인간 세대에 의해 변한다는 것을 그는 믿었고, 그러나 그럼에도 그것들이 빛 속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표지라는 것도 믿었다.   (3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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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목가적 상태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한동안은 영원이었지만,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다. 관계란 두 사람이 함께 지어서 그 속에서 살기로 정한 이야기, 집처럼 아늑하게 깃드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맨몸으로 돌아다녔고, 뱀처럼 피부가 벗겨졌고, 욕심을 잃었고, 두려움을 잃었고, 인간이 잃고도 살 수 있는 것이라면 거의 모든 것을 버렸다. 하지만 여러 언어를 배웠고, 치유자가 되었고, 함께 살게 된 원주민 부족들을 존경하게 되었으며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요컨대 그는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길 잃은 최초의 유럽인 중 하나였고, 돌아와서 이야기를 들려준 최초의 사람 중 하나였으며, 그 중 많은 이와 마찬가지로 그가 길 잃은 상태에서 벗어난 것은 돌아옴으로써가 아니라 스스로 다른 존재가 됨으로써였다. (106쪽)

진정한 어려움은, 진종한 생존의 기술은 그보다 좀 더 미묘한 영역에 있는 듯하다. 그 영역에서 필요한 것은 정신의 회복성이라고 부를 만한 능력,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기꺼이 맞을 줄 아는 능력이다. 저 포로들은 모든 사람이 살면서 겪기 마련인 사건을 극명하고 극적인 방식으로 보여준 셈이었는데, 그 사건이란 우리가 어떤 과정을 통해 과거의 자신과는 다른 자신으로 변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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