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쯤에 만났다. 나는 산곡동 신문 예비 편집장이자 아름다운 청년 기자 자격으로, 형은 만석신문 편집장으로.
나도 만나고, 형은 희철이 형을 만나고, 지아는 재양씨를 만나고. 형이 내 사무실에 오고, 나도 공부방에 가고. 그렇게 오고가며 정이 생겼던 걸까, 취재는 끝났고 잡지가 나왔지만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으니. 공부방 공연할 때마다 부러 연락을 주어서 어지간하면 빠지지 않고 보러갔다. 친구를 데리고 가기도(세윤이와 은미...)했고, 가족들과 함께 가기도 했다.
몇년 뒤 형이 강화로 이사를 간 다음엔 온가족이 다 같이 놀러가서 잠도 같이 자고, 동갑내기인 규원이랑 상욱이가 겨울 강화 들판에서 함께 뛰놀기도 했지. 상욱이랑 둘이 갔던 어느 여름밤에는 형이 이끌어주어 난생처음 반딧불을 본 적도 있다.
세월이 흘러 형네 식구들은 다시 만석동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50줄을 넘겼을때, 나는 50을 바라볼때.
철 없을 때 형한테 물어본 적이 있다. "(내가 볼땐 형은 거의 인플루언서인데, 비겁한 도망자인) 저를 왜 만나주시는 건가요?"
답은 뻔했지 뭐. 한심한 듯 나를 쳐다보면서, "만나주다니 그런 말이 어디있어~!"
한참동안 형을 일년에 두번 만났던 것 같다. 공연할 때 한 번, 공연 끝나고 한 번. 올해 공연은 어땠는지 내 소감을 말하고, 몇 년에 한번씩 직종을 바꾸며 정신없이 살았던 내 근황도 전하고. 형은 한결같은 그와 공동체의 일상을 들려주고. 그 편안하고 무덤덤한 만남이 좋았다. 온 마음을 열고 내 이야기에 귀기울여 주는 사람이라는게 느껴졌고, 그가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걸 저절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였나보다, 그와 만나는 게 늘 좋았던 건. 그가 나를 나로 바라봐주고 대해주어, 내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야, 나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거야,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형은 기억할런지 모르겠지만, 처음 만났던 시절에 그와 나눴던 대화중에 잊히지 않는 대목이 있다.
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직장의 슬로건이 "아름다운 지역공동체를 만들겠습니다"였다. 내 보기에 형과 형의 사람들은 우리가 꿈꾸는 슬로건을 이미 한참 전에 실행하고 있었고, 형이 만들던 '만석신문'은 그 지역을 공동체로 변모시키는 유력한 수단으로 보였다. 그런 내 말에 형은 이렇게 답했(던것같)다. "우리는 지역을 공동체로 만들려는 생각은 없어. 만석신문도 그래서 만드는 것도 아니고. 공동체는 간단한게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뭐 이런 과도하게 겸손하신 분이 다 있나, 싶었다. 그런데 살아보니 알게 되었다. 인구 수십만이 살아가는 행정구역 단위로서의 '지역'을 공동체로 만든다는 표현은 그야말로 알맹이 없는 구호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수 십, 수 백이 공동체(적 관계)로 살아간다는 것 또한 지난한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고, 역설적이게도 자유의 정신이 바탕하지 않는 공동체란 오래 지속될수 없는 것임을. 소박하게 실천하며 시작했던 형과 형의 사람들은 30년을 훌쩍 넘긴 지금도 여전히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으며, 그이들이 체화한 좋은 뜻과 정신이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오래 미쳐왔음을. 그 힘이 세상을 그나마 살만하게 버텨주고 있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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