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 저. 사계절. 2023년

 

2005-2006년 즈음 '민주노동당 장애인정책 담당보좌관'이 직업이었다. 결혼 전후로 한 휠체어 장애인 친구의 공부를 봐 준 경험을 한게 장애인의 삶에 대해 내가 이해하고 있는 전부인 상태에서 그냥 맡게 되었다. 할 일은 많고 일손은 모자라던 시절이어서다.

중앙당의 장애인 당사자/비장애인 정책연구원과 수시로 만나 식견을 넓혔고, 가리지 않고 장애인 단체 책임자들과 활동가들을 만났다. 성람재단,인화학교 등 당시 이슈가 되고 있던 장애인 생활시설을 찾아가 비리를 파헤치고 바로 잡으려 애도 썼다. 

당시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를 맡고 있던 노들장애인야학 박경석 교장선생을 만났던 게 그 때다.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했더라도 아주 잘 하셨을분'이라는 동료의 평가가 틀리지 않았다. 원칙적이고 유능하고 따뜻한 분이었다. 그런데 대하기가 힘도 들었다. (진보)정치란 비타협적인 투쟁을 주된 수단으로 삼는 운동과는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이 조금 달라야 한다는게 내 생각이었다. 제도를 한번에 확 바꿀 수는 없으니 차근차근, 한발짝씩 나아가야 하는거 아냐? 이동편의증진법이 통과된게 얼마전이고, 이제야 비로소 IL (자립생활)의 기초가 닦이고 있는 판인데, 여기에다가 또 투쟁을 덧붙인다고?

올해 법을 만들었으면 시행령은, 예산확보는 조금 텀을 두고 천천히 가도 되는게 아닌가. 왜 이렇게들 조급하신가 하는 마음이 솔직히 있었다. 나는 장애인 정책을 담당하여 보좌하지만, 함께 일하던 의원동지는 장애인 이슈말고도 보건복지위 소관인 온갖 주제에 더해 제주 해군기지 반대운동까지, 해야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저분들은 왜 이렇게 배려심이 부족한거지, 응?

당사자들과 만남을 갖는 일도 비장애인 100프로의 사회에서 30년 넘게 살아온 내가 적응하기에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내 속도로 튀어나가려는 몸과 마음을 잠시 진정시키고 상대의 속도에 발맞추는, 입장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요구되었다. 지금 이렇게 천천히 갈 시간이 우리에겐 없다고요! 하는 마음이 솔직히 있었다.

이 책을 읽고서 내가 고작 2년여 경험한 그 시간의 한계를 절감했다. 그들의 배려없음을 속으로 원망했던 내 위선의 실체를 보았다. 2000년대 중반, 장애인 자립생활지원제도가 시행된 것이 물론 첫 단추였지만, 그 후로도 수없이 많은 장애인들의 목숨을 건 문제제기와 희생, 헌신이 있었기에 그나마 오늘 여기만큼이라도 왔다는 걸 아프게 깨달았다. 그 옆자리, 뒷자리에 박경석, 홍은전 선생이 있었고. 그들의 삶에 오래 천착하며 함께 눈물흘리고 깃발을 들고 싸워왔던 내 동년배 고병권 선생이 이 책으로 그 싸움의 정당성을 조용히 웅변하고 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말하고 싶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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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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