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기 싫다는 내 말을 정확히는 '행복을 목표로 살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많은 이들이 행복을 '승진', '결혼','내 집 마련' 등과 동의어로 여기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행복은 그렇게 빤하고 획일적이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고 설명하기도 어려우며 저마다 손금처럼 달라야 한다. (30쪽)

"행복은 단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지 영혼의 상태가 아니다" 행복이 내가 가져야 하는 영혼의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토록 자주 절망한다.... 매 순간 '방향'을 선택한다. 행복을 목표로 삼는 방향이 아니라, 앞에 펼쳐진 모든 가능성 중에 가장 선한 길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른다... 그러니 역시 행복이라는 낱말은 없어도 될 것 가타. 나의 최선과 당신의 최선이 마주하면, 우리는 더는 '행복'에 기댈 필요가 없다. (35쪽)

나는 11월을 편애한다. 가을 앞에 붙은 '늦'이라는 말도, 앙상한 나무와 아예 모질지는 못한 바람도 아낀다... 숫자 11의 생김새를 골똘히 보면, 나무 두 그루 모양이다. 잎을 다 떨구고 빈 가지만으로 서 있는 만추의 나무... 늦가을은 진실로 깊은 가을이다. 그 깊이의 출발지가 넉넉한 그늘인 것은 알겠고, 종착지가 어디일지는 두고 보는 것이다. (42쪽)

온 마음을 다해 오느라고, 늙었구나. // 내가 귀하게 여기는 한 구절이다. 노인을 경외하는 것은, 내가 힘겨워하는 내 앞의 남은 시간을 그는 다 살아냈기 때문이다. 늙음은 버젓하지 못한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한 결과일 뿐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열차가 완전히 정지하기 전에 그러하듯, 흔들림 없이 잘 멈추기 위해서 늙어가는 사람은 서행하고 있다.... 반면 나에게는 지나야 할 풍경이 조금 더 남아 있다. 써야 할 마음도 조금 더 있다. 그것들이 서둘러 쓰일까 봐 혹은 슬픔에 다 쓰일까 봐 두려워, 노랑이처럼 인색하게 굴 때도 있다... 노인에게는 멈추는 힘이, 나에게는 나아가는 힘이 필요하다. (68쪽)

흐린 날에는 모든 것이 떨어진다. 새는 날개를 떨어뜨리고(낮게 날고), 구름은 빗방울을 떨어뜨리고, 사람은 기분을 떨어뜨린다. 흔히 그보다 조금 부드러운 단어인 '가라앉다'를 선택하지만 말이다. // 나는 흐린 날을 다정히 맞는 편이다. 침침한 빛, 자욱한 사물들, 묵직하게 흩어지는 향. 흐린 날에는 모든 존재가 자신을 잠잠히 드러낸다. 내 안의 언어와 비언어들조차 소란스럽지 않다. 그 세계가 몹시 안온하고 충만해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을 정도이다. //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는 햇빛은 온기를 주는 동시에 대상을 퇴색시킨다. 지나친 빛 속에서는 노출과다 사진 속 피사체가 그러하듯, 내가 배경속에 희석되거나 본디와 다른 모습이 되고 만다. // 그러니 진심이나 맹세는 흐린 날에 건네져야 할 것 같다. 햇빛은 사랑스럽지만 구름과 비는 믿음직스럽다.   (136쪽)

걷다가 죽어가는 벌레 곁에 있어주고, 창을 내다보는 개에게 인사하고, 고양이의 코딱지를 파주며 탕진하는 시간이 나는 부끄럽지 않다. 그 시간의 나는 진짜 '나'와 가장 일치한다. 또한 자연이나 스치는 타인과도 순간이나마 일치한다. 그 일치에 나의 희망이 있다. 부조리하고 적대적인 세계에서 그러한 겹침마저 없다면, 매 순간 훼손되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고 견딜까. /// 방 안에 있을 떄 세계는 내 이해를 넘어선다. 그러나 걸을 때 세계는 언덕 서너 개와 구름 한 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 정말 그것 뿐이다. 언덕 서너 개와 구름 한 점. 그 안의 무한, 그리고 무. 나날이 성실한 산책자로 살아가지만, 나는 아직 언덕과 구름을 다 보지 못하고 있다. (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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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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