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중구 관동로 1가.  관동(官洞)이라는 지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곳은 과거 일제 식민지 시절 인천 일본영사관, 경찰서, 우체국 등 관공서가 밀집해 있던 인천 최고의 중심거리였다. 세월은 흘러 중구는 변방의 한산한 구도심이 되어버렸고, 영화롭던 시절 세도가들이 활보했을 이 거리는 이제 변변한 술집조차 갖추지 못한 살아있는 화석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 길 한가운데 이 집, 관동로 1가 17번지 '히로이케 데시로 가옥'이 있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인가. 중요하고 새로운 것만 좇던 세태가 바뀌어, 오래고 잊혀져가는 작은 것들에도 눈길을 주는 흐름에 기운이 생겨났다. 쇠락했던 차이나타운이 되살아났고 지자체에서도 의욕을 가지고 이곳 개항장 주변을 새롭게 정비하고 있다. 주말이면 유모차를 미는 젊은 부부들이, 더운 손 깍지낀 젊은 연인들의 발길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맞춤한 시기에 이 집, 히로이케 데시로 가옥의 리모델링 프로젝트가 성사되었다. 집의 나이가 100살이 넘어가도록 옛 모습을 훼손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집을 지켜왔던 옛 가옥주가 용단을 내렸다. 눈밝은 새로운 건축주는 집의 주요부는 옛 모습을 복원하되, 상업공간으로 꾸며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기를 원했다. 박제화된 옛 모습을 '구경'하는 곳이 아니라 그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살아있는 문화재로 다시 탄생시키는 것. 카페 팟알 프로젝트의 사명이었다.

 

                                           카페 팟알 공사개요

 

     - 위치 : 인천시 중구 관동로1가 17번지 (신포로 27번길 96-2)

     - 용도 : 제1종 근린생활시설(휴게음식점)

     - 건물규모 : 3층 건물(본채) / 2층 건물 (별채)

     - 주요구조 : 목조구조

     - 프로젝트기간 :

         * 고증 및 설계 2011. 11월 ~ 2012. 2월

         * 시공  2012.3월 ~ 2012.7

 

1. 리모델링 기본방향

카페 팟알은 지은 지 약 120년가량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조계지였던 중구청 주변 지역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물로 손꼽히며, 일본 근대 도시형 주거의 전형인 마찌야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존가치가 매우 높은 건축물이다. 리모델링 공사가 까다로웠던 것은 그 때문이었는데, 공사의 상당부분이 '보존'을 넘어 '복원'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고증을 거쳐 설계를 보완하는데 적잖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프로젝트 착수부터 시공까지 9개월여에 걸친 작업의 과정을 사진과 함께 정리하였다.

구조부 보강이 필요할정도로 오래된 집을 되살리는 리모델링 설계에서 우선 필요한 것은 기본방향을 세우고 건축주와 시공자가 그 원칙에 합의하는 것이었다. 공사는 크게 세가지 요소가 혼재되어 있었으니 훼손된 부위를 복원하는 것,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부위를 보존하는 것, 각종 설비를 설치하고 새로운 컬러와 재질로 마감하여 집을 새롭게 단장하는 것이 그 세가지였다. 이에 따른 프로젝트의 기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복원과 보존, 리모델링이 조화를 이룬다.

 

건물의 대체적인 뼈대는 옛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특징과 미감을 결정짓는 핵심요소인 입면부는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 외벽 마감과 전면 창호, 지붕 등은 고증에 입각하여 건물의 최초 건립연대인 19세기말의 모습을 되살리기로 하였다.

내부는 조금 사정이 달랐던 것이, 도배지나 도색등 마감재료를 걷어내면 처음 상태를 여전히 확인할 수 있는 부위가 꽤 남아 있었다. 1,2층 천정과 일부 벽체가 대표적이다. 이런 곳은 '보존'하였다. 물론, 현재의 사용편의를 심각하게 저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

 

위 왼쪽 사진은 건물 전면부의 비늘판벽이다. 시멘트 미장 후 도장마감되어 있던 기존 벽면을 대체하여 옛 일본의 도시형 주택의 전형적인 외벽 마감 방법인 비늘판벽을 복원하여 시공하였다.

위 오른쪽 사진은 1층 카페 홀의 천장면이다. 옛 주거용 가옥은 오늘날의 건물에 비해 층고가 매우 낮았으며, 이 집 또한 공사전에는 층마다 모두 천장 구조부 아래 반자틀과 반자를 설치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후에 덧댄 반자는 모두 철거하였고, 천장면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도배지, 신문지 따위의 초배지도 깨끗이 걷어낸 후 샌딩으로 면을 다듬어 목재 고유의 결을 보존하여 되살아나도록 하였다.

사용상의 편의와는 일부 배치되기는 하나, 이 가옥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핵심요소는 마감을 전혀하지 않고 옛 모습을 그대로 두기도 하였다. 위 사진 아래 두개가 그곳이다. 왼쪽 그림은 3층 다락방으로, 목구조에 흙벽인 이 가옥의 기본 벽체구조는  물론, 서까래와 널로 이루어진 지붕틀 하지도 한눈에 들어오는 우수한 관측점(Viewing point)이었다. 오염된 벽지를 걷어내고 안전에 저해되는 부위만 보강한 후, 망실된 측벽에 유리를 끼워 2층에서 3층 벽체와 지붕의 옛 모습을 둘러볼 수 있게 하였다.

그 오른쪽 사진 역시 2층방 천장의 한 부분을 막지않고 구조부가 드러나 보이도록 의도적으로 노출시킨 곳이다. 좁게 쪼갠 대나무를 가로 세로 새끼로 엮은 틀에 황토흙을 이겨바른 일본식 흙벽의 모양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물론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꼭 필요한 각종 설비는 모두 구비하였다. 급배수 설비와 화장실 (3개소), 전기 및 통신 설비, 냉난방 설비가 도입이 되었고, 가능한 설비배관은 벽체와 바닥으로 매립하여 노출을 최소화시켰다.

 

둘째는 건물의 안전확보다.

목재 구조의 주요부재들은 대부분 상태가 양호하였으나 오랜 시간동안 서서히 진행되었을 균열과 뒤틀림은 피할 수 없었다. 본채의 경우 가옥 전체가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 육안으로도 확인될 정도였으며, 원래는 중간기둥이 전혀없이 구성되었던 1층 홀에도 보강 기둥을 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여, 본격적인 내장공사에 착수하기 전, 구조보강공사를 선행하였다. 왼쪽 위 사진은 1층 홀 덧댄 기둥을 강철기둥으로 교체하는 모습이다. 오른쪽 위는 동쪽으로 기운 벽체를 보강하기 위해 건물 좌우 측면부 전체에 각관 구조틀을 시공하고 있는 장면이다. 구조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기운 벽체를 되살리기가 어려워 고안한 방안이었다.

부분적인 기둥 보강도 필요하였다. 왼편 아래쪽 사진은 강철플레이트를 ㄷ자로 절곡한 후 보와 기둥을 각각 감싼 다음 직각을 유지하도록 삼각형 모양으로 재단한 평철을 용접하여 훼손정도가 심한 천장 보를 보강한 모습이다. 이 보강 철구조는 목재로 감싸거나 하지 않고 유성도장으로만 마무리하였다. 집이 나이를 먹어 필요한 곳을 수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집의 역사이므로, 굳이 그 부위를 감출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고 건축주도 이러한 관점에 선선히 동의해주셨기 때문이다.

바닥 보강도 필요했다. 본래 주거용도로 사용되었던 2,3층에는 두께 50mm 짜리 짚다다미가 깔려 있었는데 이를 들어내기도 하였거니와 벽체가 기울어지며 바닥도 심하게 수평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 오른편 아래 사진이 2층 바닥 보강 공사 모습이다. 바닥 수평을 잡으며 강도를 높이기 위해 장선과 15mm합판을 깔았다.

위 사진은 별채 내부 벽 마감재를 철거한 모습이다. 6m 이상 되는 축대가 바로 벽으로 쓰이고 있었다. 최초 계획단계에서는 별채를 완전히 멸실하고 안뜰을 넓게 쓰려고 했었으나, 수십년, 길게는 100년 가까이 벽체와 축대가 한몸으로 세월을 보내온 셈이니 섣불리 집을 헐어내다가는 축대의 안정성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별채는 멸실당하는 운명을 모면하고 공사 범위에 포함시키게 되었다. 토목공사의 수준까지 생각하여 대지 전체를 완전히 밀어버리는 공사가 아니었으므로, 공사비용이 다소 추가되더라도 안전을 포기하면서까지 애초 계획을 고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째, 공사비용의 한도내에서 시공한다.

이 프로젝트는 문화재 가치가 있는 근대건축물을 복원하는 공공성을 띤 작업이었다. 한편 관공서가 아닌 개인이 본인의 상업적 용도로 리모델링을 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리모델링의 첫번째 기준인 '입면은 최대한 원형그대로 복원한다'를 말그대로 최대한 실행하려고 할 때 바로 부닥치는 문제가 돈이다. 이미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를 중앙, 지방정부의 재정지원으로 복원하는 작업이 아닌 것이다.

지붕재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그런 문제를 겪었다. 100년전에 사용된 일식평기와와 흡사한 자재를 찾는 것이 관건이었다. 점토를 구워만든 전통기와를 시공하려면 지붕에 흙과 단열재료를 깔아야 하는데,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지붕의 하중또한 무시할 수 없어 모양이 비슷하지만 무게는 훨씬 가벼운 금속재료 기와를 찾기로했다.

기와 시공업체 5~6곳과 접촉하여 견적서와 카탈로그, 샘플을 받아보고 비교하는 지루한 작업을 거쳐야 했다. 징크판넬, 칼라강판기와, 한식동기와, 플라스틱 기와를 모두 검토하였고, (위 왼편 사진부터 시계방향) 결국 아래 사진과 같이 금속기와를 최종 선정하여 시공하였다.

이 금속기와는 알미늄-아연도 강판위에 보호피막과 스톤칩을 코팅한 자재로, 시공후 형태나 색상이 일식기와와 유사하다. 전통기와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가볍고 시공성이 우수하며 공사비용도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요소였다.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증시 일본인 근대건축 전문가를 입회시켜 자재를 선정하고, 필요한 자재와 시공기술자를 일본에서 수입했더라면 복원의 완성도가 훨씬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용걱정은 제쳐두고 원형을 살려내는 데에만 촛점을 맞추는 작업이 아니었으므로, 차선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2. 고증과 설계보완

 

이 건물의 내력은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설계하는 시기에 집중적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최초 건립시점이 1930년대일거라 추측했는데, 문헌조사를 통해 그로부터 4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 1890년대임이 확인되었다. 아래 그림은 1880년대~1890년대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영사관 앞 거리(현 관동로) 사진인데, 이미 이 사진속에 히로이케 데시로 가옥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19세기말 일본에서 한창 짓고 있던 건축양식은 마찌야(町家)다. 현대 한국어로 옮기면 '도시형 상가주택'쯤 된다. 조선 개항후 일본인조계로 들어온 초기 일본 이주민들 또한 이 마치야 양식으로 집을 지었을 것이다.

마치야는 대개 2층 구조를 가지며 1층은 점포와 접객공간으로, 2층은 점포주 가족들이 사용하는 내실로 대개 사용되었다. 도시 인구가 급증하여 건물의 이용효율을 높이려는 압박이 심해진 19세기 말 이후부터는 3층으로도 지어졌다고 한다. 

1층의 평면구조는 아래 왼쪽 그림과 같다. 

대로에 면한 1층 전면부에 상점(みせ,미세)이 있고 안쪽에 부엌 등 복합공간으로 사용하는  中の間(나카노마)가 있다. 그 뒤쪽에 집의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는 座敷(자시키)가 있으며, 현관부터 안뜰(にわ,니와)까지 이어지는 좁고 긴 통로(通り庭, 토오리니와)가 이 세 공간의 측면에 자리잡고 있다. 안뜰의 뒤쪽에 본채를 마주보는 위치에는 仕事場(시고토바)가 있어 여러가지 작업을 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오른쪽 평면도는 철거 전에 실측한 히로이케 데시로 가옥의 평면구조다.  본채 끝부분에 위치한 방과 부엌은 후에 바닥 난방과 벽체 보강을 하며 구획을 나눈 것으로 보인다. 안뜰 위쪽 구석에 있는 욕실도 목구조인 본 건물과는 다르게 조적조인 것으로 보아, 한참 후에 필요에 의해 지어졌을 것이다.

이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형적인 마찌야의 구조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 구한말~일제 강점기 인천 중구 거리 사진을 참조하고 자료를 검토하며, 최초 설계가 상당부분 보완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다음 그림을 보자.

위 그림은 맨 처음 디자인했던 입면 컷이다.

공사 전 이 집 2층 창가에는 그림처럼 테라스가 있었다. 있던 테라스는 살려두었고(1), 1층 외부창문은 2,3층과 똑같은 모양으로 설계하였으며(2), 건물 주 출입문은 양개 자유조방문(3) 방식이었다.

몇 달 동안 고증과 보완을 거쳐 아래 그림으로 입면이 바뀌게 되었다.

 

[참고] 공사전 건물 사진 보기  (<-클릭)

19세기말에 건립된 마찌야의 전형을 따르는 건축물이므로, 최초 건립시에는 테라스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테라스를 없애고 눈썹지붕을 올렸다. 도로에 면한 1층 창문에는 일본식 가옥의 전통을 따라 외부격자창 (表格子, 오모테코우시)을 달았다.

출입문의 개폐방식에 대해서는 자유조방 여닫이문이 당시에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은행이나 경찰서처럼 대규모 관공서 건물에 한해 쓰였다는 지적에 따라 2폭 미서기문으로 최종 변경하게 되었다.

마찌야구조는 아니지만,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인가옥의 복원사례를 찾아 디테일한 시공계획을 세우는데 반영하기도하였다.

위 사진은 군산 소재 히로쓰가옥 외벽의 비늘판벽(下見板) 누름대((押緣) 시공모습이다. 비늘판벽은 베벨사이딩(beveled siding)을 말하는데, 요새 공장에서 나오는 기성자재에 비해 폭이 넓다. 판벽을 고정하기 위해 중간중간에 덧댄 누름대는 자세히보면 경사진 모양대로 일일이 정교하게 깎아서 붙여놓았다.

제대로 된 고증없이 모양만 비슷하게 만들어 놓으면 참 어설퍼 보인다는 것을, 인근 동국사 앞길 벽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래 사진을 위 사진과 비교해보면 위에서 언급한 두가지 중요한 특징이 차이가 난다. 사이딩재의 폭은 좁고, 누름대는 안쪽면을 모양대로 깎지 않고 그냥 대서 붙였다.

이와 같이 흥미롭지만 복잡하고 많은 시간이 소요된 고증단계를 거쳐 이제 비로소 시공에 돌입할 수 있었다.

 

 

3. 집의 내력을 보여주는 흔적들

 

시공전 현장 확인을 하다가 혹은 철거를 하며 곳곳에서 이 집의 오랜 내력을 알려주는 증거들이 나왔다.

먼저 흙벽. 아래 사진과 같이 나무 기둥과 기둥사이 벽체는 흙벽이다. 짚끈으로 엮은 대나무살을 좌우 기둥에 단단히 고정한 다음 찰흙을 이겨 판판하게 채운다음, 5mm정도 두께로 얇게 회칠로 마감하였다.

그런데, 처음 시공한 흰색 회벽은 시간이 흐르며 오염되었을 것이다. 벽지를 발라 흙이나 회칠이 부서지는 것을 보강하는 인테리어를 여러번 거듭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 사진은 2층 중간방 정면 벽체 철거중에 찍은 것이다. 회벽위에 페인트 도색을 하였고, 그 위에 초배지로 신문(1930년대 每日마이니치 신문)을 바른 다음 다시 도배지를 정배로 발라 붙였다.

방에 따라서는 초배지로 신문 대신 장부책 종이를 쓴 곳도 있었다. 이 집이 야마토쿠미 - 인천항을 들고 나는 화물을 운송하는 하역사무소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수십년 동안 쌓인, 보관할 필요성이 더이상 없어진 낡은 장부책이 끊임없이 생겨났을 터이다.

네댓겹 들러붙어 있는 초배지+정배지 꺼풀을 깨끗하게 떼어내보니, 원래의 회벽이 우수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곳도 있다. 이 사진은 3층 벽면으로, 짖궂은 낙서가 그려져 있다. 오른쪽에는 삿갓을 등에 매고 장삼을 걸쳐입은 승려의 뒷모습도 볼 수 있다. 보존가치는 알 수 없으나 이 집의 역사성을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부분이라 벽을 허물거나 덮어버리지 않고 유리로 보존하였다.

벽면 철거가 진행될 수록 곳곳에서 낙서가 나타났다. 신문지와 낡은 장부종이가 어지럽게 붙어있는 것을 떼어낸 아래 회벽면에는 상투를 튼 주먹코의 남자 그림이 그려져 있다. 공사 전 2층 계단 앞 첫번째 방 벽면이다.

일본인 거주시부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짚다다미도 남아 있었다. 유지관리가 쉽지 않아 요즘엔 일본에서도 짚다다미를 잘 쓰지않는다고 한다.

아래 사진은 3층 천장면을 올려다 본 모습이다. 마찌야의 전통적인 천정 마감방식인 網代天井(あじろてんじょう,아지로덴죠)다. 갈대나 노송나무를 앏게 찢어 엮어만든 것이다. 이 또한 이 집이 얼마나 오래된 곳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에 해당한다.

아쉽게도 지붕공사시에 함께 철거되었다. 100년이 넘은 시간동안 머금은 습기와 계속된 부식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 사진은 뒤채 방바닥 철거장면이다. 앞에 잔뜩 쌓아놓은 돌더미는 방구들이다. 열전도성이 좋아 온돌방 구들재료로 최고로 쳤다는 점판암이었다. 굉장히 오래전에 한국식 온돌방 공사를 해서 사용해온 흔적인 것이다.

이 돌은 안뜰 디딤돌과 화분받침대로 재사용하고 있다.

이 집이 어떤 집인지를 직접 드러내주는 흔적들도 계속 발견되었다. 2층 나무 벽체에 야마토쿠미 (大和組)가 선명하게 적혀있다.

팟알에 게재된 이 집의 연표를 보면 야마토쿠미는 오사카상선의 화물을 취급하는 하역업무를 했다고 한다. 좌우측 외벽 보강 공사를 위해 2층 교육실 동쪽 내벽면을 뜯어내던 중 아래 사진과 같은 홍보물이 나왔다. 大阪商船(오사카상선)주식회사가 메이지 34년과 35년 (1901년, 1902년)에 출항하던 지점망을 안내하는 포스터다. 역시 이 집이 아무리 짧게 잡아도 111년 이상되었다는 증거물이다.

요새 건축공사를 완료하면 머릿돌(정초)을 세워 시공자와 설계자의 이름을 써놓듯, 과거 목조건물을 짓던 시절엔 대들보에 대목수의 이름을 써놓았다고 한다. 이 집에도 있었다!!

 

 

4. 시공디테일

 

베벨 사이딩 외벽마감
 
일본 목조주택의 전형적인 외벽 마감방식인 비늘판벽 (Beveled Siding)을 시공하되, 디테일한 마감방식과 외형을 최대한 일본식 방법에 가깝게 처리하고자 하였다. 베벨사이딩재는 시중에서 취급되는 기성재중 가장 폭이 넓은 185mm 북미산 적삼목 사이딩재를 사용하였고, 중간에 사이딩을 눌러서 덮도록 처리한 목재누름대는 무절 미송각재를 사이딩재 단면의 모양에 맞추어 일일이 깎아서 덧붙였다.
최종마감은 도토리색 아쿠아스테인을 2회 스프레이 도포하였다.

본채/별채 모두 외벽은 모두 위의 적삼목 베벨사이딩으로 마감하였다. 좌우측벽면은 거의 시선에 띄지 않는 곳이고 외단열을 보강할 필요도 있어 우드사이딩패널을 시공하였다. (아래사진)

 

창과 문
 
창호의 디자인과 제작설치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가장 공을 들인 공종이라 할 수 있다. 창호 설계시 반드시 충족해야 했던 요구조건들이 있었으니, 첫째, 옛 모습에 최대한 가깝게 일본 전통창살모양으로 제작할 것, 둘째, 단열/차음 성능을 확보할 것, 세째, 내구성과 관리 편의성을 높일 것 등이다.
일본의 전통창호는 쇼지(障子 (しょうじ))라 하여, 일본전통건축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다고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최선의 답일 수는 없는 것이, 일본보다 훨씬 혹독하게 추운 겨울날씨에 대비한 단열성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관리와 보수가 훨씬 편한 자재와 시공방법이 있다면 굳이 과거의 방법을 고집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박물관을 짓자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들어가 사는데 문제가 없는 집이 되어야 한다는 시공원칙은 창호 설계와 제작에서도 중요했다.
 
그래서 창문은 위의 요구사항을 다음과 같이 해결했다.
 - 원형이 남아 있는 창은 원형대로, 원형이 없어진 부분은 고증을 거쳐 복원하여 설계.
     => 원형이 훼손된 1층 전면 격자창(表格子)은 고증하여 복원 제작
 - 건물 전면부 창은 3중창으로 설계, 제작. 외부 목창 + 중간 알루미늄샤시 복층유리창 + 내부 목재틀유리창 또는 한지아크릴 쇼지
     => 알미늄샤시 복층유리창(Pair glass) 적용으로 기밀성, 단열성, 방수성능 제고
 - 목재 유리창은 통유리를 교체할 수 있게 제작하고, 쇼지에는 두꺼운 종이 대신 한지아크릴을 끼워 내구성 제고.

 시공된 모습이 아래 사진이다. 1층 맨 바깥창은 복원한 격자창을 설치하였고 외창으로 복층유리창 AL샤시, 내창으로 목재틀유리 미서기창을 설치하였다.

 
  

위 사진은 2층 베란다 앞에서 밖을 내려다본 view로 찍은 사진이다. 맨 안쪽에 한지아크릴을 끼운 장지문(쇼지)이 있고 베란다 공간을 띄운 다음 AL샤시가 설치되었다. 외벽에 목재유리창을 설치하여 옛 모습을 살려낸 것은 물론 방수/단열 효과를 배가하였다.

 

창호의 형태를 과거 모습에 충실하게 재현하려 애쓴 사례는 2층 중간방에서 찾아볼 수 있다.

2층 복도에서 4폭 유리 미서기문 - 리모델링하며 철거하였다 - 을 열고 들어가게 되어 있는 이 방은 가족들이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공동생활공간인 차노마 (茶の間,ちゃのま)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쪽에 인접하여 붙은 방은 쯔기노마(次の間,つぎのま, 곁방)에 해당한다. 일본 전통가옥에서 차노마와 쯔기노마 사이에는 나무문틀 양쪽으로 두꺼운 천이나 종이를 바른 후스마 (襖,ふすま)를 설치한다.
 
위에 언급한 쇼지는 베란다 안쪽에 설치하고 반투명 자재(문종이)를 써서 햇빛의 세기를 줄여 투과시키는 일종의 블라인드 역할을 했다면, 이 후스마는 불투명 자재를 써서 요즘의 파티션 구실을 한 셈이다.
 
2층 방 벽면에는 레일과 할로겐램프를 설치하였다. 일본의 전통주거용 건축물 내부를 원형에 가깝게 살린 것으로 이 자체로도 볼거리가 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소규모 갤러리로도 활용될 예정이다.
 
아래사진은 3층 입구와 벽 붙박이장 (오시이레おしいれ)에 각각 사용했던 2폭 미서기판문을 원형 복원하여 설치한 모습이다.

 

기와
 
기와자재의 선정과정은 (2) 리모델링의 기본방향에서 자세히 언급하였다.
주로 사용한 것은 금속기와지만, 일부는 기존 기왓장을 재사용하여 시공하기도 했는데, 아래 그림과 같다.

원래 지붕에서 측면 통로 (토오리니와) 부분을 덮었던 일식평기와는 2층 눈썹지붕으로 옮겨 깔았다. 붉은 색이 도는 시멘트 기와는 별채 지붕재로 옮겨 재사용하였다.
 
 
내부 마감
 
팟알은 목재 반자틀에 매단 천장이 본래 모든 층마다 다 설치되어있었다. 1층 천장에 도배지가 겹겹이 붙어있고 3층 천장이 아지로덴죠(갈대나 노송나무를 얇게 찢어 엮은 천장)인 점을 생각해보면 반자틀과 천장은 후에 보태어 공사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기존 천장이 너무 낮게 매달려 있어 이를 모두 철거하였다. 반자틀까지 깨끗이 떼어낸 다음 나타난 목재면 나무결무늬가 여전히 아름답게 살아있어 가능하면 원자재 그대로 살려두기로 하였다. 불가피한 부위만 스테인도색을 하거나 (3층) 석고판에 도배로 마감하였다. (2층 일부)
 
벽면은 석고판 두겹 시공 후 반광 수성광텍스 도장 (1층, 2층 계단실) 또는 도배마감이다. 가능하다면 최대한 기존 건축요소는 살리고 싶었으나, 기울어지거나 흙벽이 허물어지지 않은 벽체가 거의 없었다.
 
바닥은 다다미를 교체하여 시공하거나 기존 마루바닥/계단바닥을 유지하였고 (2/3층), 1층 카페의 경우에는 층고를 확보하고 수평을 잡기 위해 바닥콘크리트 철거- 재미장을 한 다음 강마루를 깔았다.

1층 카페. 천정은 페인트 도배지 제거 등 면정리 작업 후 샌딩하여 나뭇결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마무리하였다.
벽은 오염을 방지하는 수성광텍스를 반 무광으로 도장시공하였다.

2층 전시실(중간방). 왼편 벽체는 특이하게 중간보와 기둥이 벽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구조로 되어 있다. 고재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이를 감싸는 대신 기둥과 보 사이에 석고판을 새겨넣고 도배로 마감하였다. 일손은 두배로 들어갔어도 공들인 보람이 있게 결과물이 잘 나왔다.
2층 마루바닥과 계단판은 훼손되거나 강도가 떨어지는 부분을 보강한 다음 고동색 스테인 착색 후 우레탄바니쉬 2회 도장으로 마감하였다.

2층 교육실. 층고가 낮기도 하고 그 자체로 중요한 인테리어 요소인 보를 강조하기위해 등기구는 작고 가느다란 T-5를 채택하여 보 뒤편으로 감추어 달았다.

3층 천장은 다른층과 달리 바로 지붕이 된다. 서까래를 제외한 나머지 지붕자재가 모두 신재로 바뀐 모습이 바로 올려다보여, 여기는 천장 전체를 스테인 스프레이 도장으로 마감하였다.

계단판. 스테인 1차 착색 후 샌딩을 해서 나뭇결 무늬가 잘 살아나게 처리하였다. 광택은 우레탄바니쉬 도장으로 인한 것이다.
 
 
외부 마감
 
집의 나이 120년은 짧은 세월이 아니다. 벽체가 기울어지는 사이, 출입구 계단 석재도 부서지고 내려 앉아 보수가 필요했다. 석공을 부르고 장비를 동원하여 돌계단을 다시 쌓았다. 망실된 왼쪽  받침 긴돌을 빼고는 원래 있던 화강석을 자르고 다듬어 맞추어 쌓았다.

돌계단을 오르고 현관을 열면 이런 좁고 긴 통로가 나온다. 회랑, 마치야의 구조에서는 토오리니와다. 바닥면의 평활도가 나빠 바닥마감은 타일대신 콩자갈을 본드시공으로 붙였다.

 

안뜰에는 직경 1cm안팎의 콩자갈을 깔고, 뒤채 바닥 철거시 골라놓았던 구들장 점판암을 군데군데 디딤돌로 깔아 재사용했다.
아래사진은 본채 카페 뒷문에 서서 안뜰을 건너 바라보이는 뒤채 출입문/벽체의 모습이다.

 

기타
 
실내 화장실 3곳을 신설하였다. 아래 사진은 본채 2층 화장실이다. 목조주택인 점을 고려하여 완전 건식으로만 시공하였다. 타일을 붙이지 않은 상태로 도기를 앉혔는데, 바닥은 보강하여 붙인 합판 위 장판, 벽면은 방수석고판 위 도배로 마감하였다.

붙박이 의자, 바테이블, 카운터, 식수대 등 치수와 모양을 현장상황에 맞춰야 하는 가구들은 현장에서 직접 제작하여 설치했다. 사진은 '재봉틀 탁자''다. 40대 이상 세대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소품 되겠다. 재봉틀 다리에 미송집성판으로 만든 상판을 얹어 근사한 모양으로 리폼하였다.

카페 간판은 옛스런 느낌에 어울리도록 샌드블라스트 나무 간판으로 제작하였다.



리모델링, 인테리어 설계 및 시공 (주) 굿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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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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