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운전하다 이문세를 들었다. 중학시절부터 즐겨듣던 노래인데 노랫말에 깊이 침잠해보긴 처음이었다.

'세월이 흘러가면 어디로 가는지/나는 아직 모르잖아요/그대 내곁에 있어요 떠나가지 말아요/나는 아직 그대사랑해요/그대가 떠나가면 어디로 가는지/나는 알수가 없잖아요/그대 내 곁에 있어요 떠나가지 말아요/나는 아직 그대 사랑해요.....'

80년대 중반, 사랑에 울고 웃던 20대 중반의 나어린 이영훈-이문세 콤비가 만들어낸 감미로운 연가 '나는 아직 모르잖아요'. 어제 가만히 들어보니 이 노래는 꽤나 심각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적어도 어제의 내겐 그렇게 느껴졌다.

그대가 곁에 있어 누리는 행복이란 오직 지금-여기(now-here)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 세월이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버려 그대의 마음, 아니면 내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므로. 세상은 넓디넓은 곳, 그대가 만약 어디론가 가버린다면 이 기쁨도 사라지는 것. 광대한 공간과 영원한 시간속을 걸어가는 한 점 먼지같은 나, 그리고 너, 부디 곁에 있어 외로운 날 지켜주길. 내가 네게 그런 사람으로 소용되는 기쁨을 내게도 맛보게 해 주길. 눈물나게 고마운 그대여.

뭐 이런 메시지. 하지만 수도 없이 변주되어도 모든 케이스마다 사랑이 새롭고 가슴벅찬 이유는, 인간의 존재론적 허무함을 건드리기 때문일 것이다.


더운 피가 흐르는 젊은 남녀의 심장에 바짝 줌인했던 렌즈를 확 뒤로 물려본다. 빠르고 경쾌하게. 죽죽 쭉 죽쭉 네모난 프레임에 모습을 드러내는 피사체는 이런 것들이다. 남자들과 여자들, 어른들과 노인들이 살아가는 집, 가정과 가족들. 재생산에 기본단위가 되는 부족/마을 공동체들이 그 다음에 나타나고 도시가 보인다. 자원의 불균형으로 착취와 배제에 고통받는 농촌지역도 보이며, 나라가 보인다. 그 다음에는 문화권이다. 동아시아, 남아시아, 아메리카, 유럽, 남아프리카. 그리고, 지구. 그러고 보니, 구글 어스?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바라보려면 시간과 공간에 걸쳐 파악해야 하리라. 역사와 지정학이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세계를 궁금해하는 진짜 이유는, 그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행복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와 지정학이라는 규정속에서 개별 인간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 생애과정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것이다.

이 책, <다른 세계를 요구한다>는 그런 관점을 독자들에게 요구한다. 세계를 제대로 파악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름하여 '세계학'이다.


<다른세계..>는 스웨덴 출신 사회학자인 예란 테르보른이 2011년에 쓴 초심자를 위한 '세계학 입문서'다. 저자가 철학자나 역사학자가 아니라 사회학자라는 점이 중요하다. 인류문명의 탄생기부터 1만년 가까운 시간을 거슬러 논의를 시작하지만 저자의 관심사는 늘 '오늘 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에 왔는가'이다. 하여 흐름은 일별하고, 현재의 문제를 구체화해야 하는 대목에서는 최신의 통계수치를 자유자재로 동원해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활용한다.

인류와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저자의 방법을 요약해본다.

 

0. 전제)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도전은 공통 인류의 세계라는 이 새로운 세상을 이해하고, 거기에 제대로 대응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공통성이란 반드시 동일함이나 평등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다. 말하자면 중세의 영지마을이나 노예농장, 인도의 카스트 제도, 또는 현대의 '글로벌 도시'등이 모두 하나의 공통된 사회상을 드러낸다고 보는 편이 좋다. ...중략..

핵심주제 ; 인류와 그들의 세계에 대한 이해와 함께 행동까지 다루려기 위해 생각해야 할 주제들. 

 

1. 우리는 어떻게 현재의 우리가 되었는가? - 현대 세계의 사회문화 지질학 ; 인간 사회를 형성하는 세가지의 큰 지층

1) 문명들 (그리고 거기에 따른 가족-성-성역할 체계) : 5개 문명 + 세계화의 조류로 2개가지가 더해진 7개 가족체계

  - 중국권문명 (동아시아 유교가족)

  - 인도권문명 (남아시아 힌두 가족)

  - 서아시아 문명 (서아시아/북아프리카 이슬람 가족)

  - 유럽문명 (유럽 기독교 가족)

  -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가족체계들)

  -                              (동남아시아 다원적 종교 가족)

  -                              (아메리카 크리올 가족)

2) 세계화의 여섯가지 조류

  - 세계적 종교 및 문명의 경계선 형성 (4~8세기)

  - 유럽의 식민주의 (16~17세기 초)

  - 프랑스-영국 대전 (11750~1815) 그리고 유럽 초강대국의 출현

  - 제국주의의 보편화, 개발 및 저개발 개념의 등장 (1830~1918)

  - 정치의 세계화 (1919/1941/1947~1989)

  - 세계화의 독단과 변화하는 그 의미 (1990~)

3) 근대성 : '진보하는' 직선적 시간개념에 대한 감각.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를 향한 시간지향성이 지배하는 하나의 시대, 사회, 문화, 정치. 근대성을 향해/거슬러 투쟁해온 역사적 경험은 오늘의 세계를 '개발(선진)'과 '개발도상'또는 '저개발'로 나눔.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는가가 우리 삶에 엄청난 차이를 만들게 됨. 이 균열의 기원과 경로는 무엇이었나?

 - 유럽의 내생적 경로

 - 신세계의 타자화 경로 (아메리카/오세아니아)

 - 식민지의 외상성 경로 ; 침입자와의 동화, 그리고 반란 (아시아/아프리카)

 - 반응적 근대화의 경로 : 적응의 시초와 결말 (일본)

 - 복합적 경로 (러시아/중국)

 

2. 왜 우리나 타인들은 우리 또는 그들의 방식대로 행동하는가? '세계의 역학'을 구성하는 다섯가지, 혹은 인류진화의 동력

 1) 생계양식

 2) 인구생태 : 인구의 크기와 자연환경사이의 관계

 3) 인정과 지위의 존중과 배분

 4) 집단권력의 정치

 5) 지식과 의사소통과 가치관의 문화

 

3. 지정학과 지리경제학의 세계무대

 

4. 인간의 생애과정 ; 인류역사의 지질학을 기반으로 출발해, 현재 세계무대의 역학에 의해 추동 또는 봉쇄되는.

 

5. 결론. 우리가 여기에 어떻게 왔는지를 이제 정리한 다음,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논리적이다. 그리고 엄청난 스케일이다.

결론부에 이르러서야 왜 이 책의 제목이 '다른 세계를 요구한다'가 되는지 이해가 된다.

'나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위해 지금까지의 기나긴 논의를 따라온것이다.

사회문화지질학이 그 뿌리가 된다. 5개 문명과 가족체계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 기반은 세계화의 여섯단계 조류를 거치고 근대성을 둘러싼 투쟁속에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어 온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무엇이 인류를 여기까지 진화시켜 왔는지 이제 알게 되었다면, 무엇이 인류사회를 움직이는지, 그 무엇에 의해 오늘의 나의 세계는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세계의 역학이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인간의 삶과 죽음으로 귀결된다. 생애과정의 각 단계는 내가 속한 세계의 뿌리와 동력에 의해 주조된 결과에 좌우된다. 노르웨이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유럽문명과 가족체계속에서 자라나서 노르웨이가 거쳐온 세계화의 조류와 근대성에 관한 투쟁의 결과인 현재의 모습에 대개 규정되기 나름인 것이다. 높은 소득에 바탕한 세계 최고의 복지제도 속에서 나고 자라 결혼하고, 성년기와 노년기를 거쳐 죽음에 이른다.

나의 생애과정이 고단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면, 나의 세계를 객관화시키는 관점과 사고의 체계가 필요하다. 그러고 나면, 나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다. 비로소 '다른 세계를 요구'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세계 각지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낸 저자가 보기에 그 생애과정들은 여전히 대개 고되고 집중적인 노동에 얽매어있다. 다른 세계의 모습은 그러면 어떠할 것인가. 생애과정 단계별 이상적인 사례를 조합하면 이렇게 된단다. (402쪽)

"21세기 가장 이상적인 지질-사회적 생애과정을 하나 그려본다. 안전하게 태어나서 북서유럽의 비권위적 부모로부터 양육을 받는다. 학업성취도는 세계 최고이나 부모 재산과 무관하고 주입식 교육이 전혀 없는 핀란드식 국립학교에 다닌다. 이어서 세계각지를 여행할 능력을 갖춘 북서유럽의 자유로운 청년으로 활동한다. 옥스브리지 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나와는 다른 문화에서 온 훌륭한 파트너를 만나 아시아의 어느 곳에서 잊을 없는 결혼식으로 멋지게 청년기를 마감한다. 그 다음 동아시아(또는 인도)의 대도시에서 흥미진진하게 일하며 높은 보수를 받는 성년기를 보낸 후, 제네바나 밴쿠버처럼 조용하고 아름답고 네트워크가 잘 짜여진 곳에서 산다. 장례는 가장 존엄하게 치러지는 아프리카에서 치르는게 좋다"

 

세계학 입문을 위한 개론서라고 하지만, 쉽지 않은 책이다. 오늘의 세계를 만든 역사적, 지정학적 변화의 거대한 흐름을 자신만의 독특한 개념과 체계로 정리해낸 역작이라, 저자의 교통정리를 좇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힘들여 끝까지 쫓다가 보니, 세계를 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독창적인 도구-확대경+현미경-를 하나 빌어온 느낌이다. 문명의 성쇠와 역사의 변동, 가족-성-성역할 체계의 공고함, 문화권별로 저마다 각자의 유형을 강하게 갖추게 된 생애과정까지. 추천사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이런 넓은 관점으로 봤을때 미국식의 신자유주의로 사정없이 쏠리고 있는 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해 우리는 '다른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가지고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게 된다.

사회학 텍스트로서 이 책이 갖는 또다른 미덕은 정직한 통계수치를 동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논지를 따라가다보면 구미 선진제국만이 주인공이었던 시각에서 벗어날 수 밖에 없는데, 지정학과 인구를 중시하는 그가 볼 때, 현재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로서 국가는 미국이나 일본이 아닌 중국과 인도다. 두 나라 모두 10억이 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 그가 볼 때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학문을 한다면, 생애를 걸고 무언가를 한다면, 이 정도 스케일이어야 좋겠다. 그런 관점이 신선하다. 세계학이다.

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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