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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벗 여숙자 선생님은 도림동 배재완 선생의 부인이다.
97년이던가, '도림동 송전탑 건설 반대' 농성장에서 처음 뵈었다.
늦가을 산중에 친 농성천막은 몹시도 추웠지만 선생님 부부의 배려로 견딜만 했던 기억이 난다.
부부가 오래도록 도림동에서 배농사를 지으셨다. 갓 수확한 배맛이 아주 달았다.

오래지 않아 싸움은 패배로 끝났지만 한번 맺은 인연은 오래 이어졌다.
기태형, 성준등과 함께 가끔씩 댁을 찾아 봄이면 풀매는 일, 여름이면 배 농사를 거들었다.
나는 몇 년 후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고, 도림동 배선생 댁에 가는 일은 아이에게도 좋은 체험거리가 되겠다 싶어
그 후로는 아이를 앞세우고 찾았다.
당신 손주보듯 귀여워 해 주시고, 배가 터지도록 삼겹살을 구워주시던 여숙자 선생의 사람좋은 미소때문에 더 배가 불렀다.

여숙자 선생님은 인일여고 2회 졸업생이다. 배재완 선생은 고려대학교를 나오셨다. 인텔리부부다. 그 시절이라면  얼마든지 좋은 직장에 취업할 수 있었을텐데도 농과대학을 마친이로서 도림동 농촌마을에 정착해 정직하게 농사꾼으로 살아온 배재완 선생과 평생을 함께 농사지으며 살아오셨다.
자식들도 장성하여 출가시킨 후 여유시간이 생긴 여숙자 선생님은 붓글씨를 배우러 다니셨다.
과일창고 한 켠을 개조하여 작업실로 꾸며준 남편 배재완 선생의 외조가 선생의 공부에 도움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몇 년 서화를 익혀 2006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고, 2008년에 두번째 개인전을 가졌다.

나도 두번째 개인전을 보러갔는데, 장소인 연수구청 1층 홀에 전시회를 본 다음, 지하식당에 가서 배선생님의 칠순잔치를 즐기도록 준비를 해 두셨더랬다. 신선했다. 부러 칠순잔치를 열어 사람을 부르는 일이 어쨌거나 부담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셨을 것이다. 돈봉투는 일체 사절이었다.
"나 일흔 됐다. 동무들아, 어르신들, 후배며 동생들, 조카들아. 그동안 내 곁에서 함께 살아주어서 나 참 고맙다. 그 고마움에 답하려 소박한 잔치상을 차렸다. 아무 부담없이 와서 밥한끼 먹고들 가렴. 참, 우리 사람 - 배선생은 꼭 여숙자 선생을 이렇게 불렀다 - 붓글씨 공부 열심히 해서 두번째 개인전도 겸했으니 와서 글씨와 그림도 좀 보구."
아마, 이런 마음 아니셨을까 싶었다.
그게 2008년 가을이었는데, 그 후론 한번도 찾아뵙지 못했다.
기태형을 통해 배선생님이 건강이 많이 나빠지셔서 농사를 더 이상 짓지 못하신다는 말씀을 들었던것 같기도 하다.

당황스럽게도 엊그제 부고가 날아왔는데, 건강이 더 안좋아지셨다는 배선생님이 아니라 여선생님 별세를 알리는 통지였다. 향년 67세. 고단한 노동, 묵묵하게 견디며 젊은 세월을 다 보내고, 이제 인생의 2막을 멋지게 펼쳐가던 시점인 것인데, 마음이 몹시 아팠다.
회사 회식 자리가 끝나고 늦은 시간이었지만 인사라도 꼭 드려야 겠다 싶어 장례식장을 찾았다.

부의금 봉투를 접수하는 젊은 이 대신, 큼지막한 안내문이 붙어 있다.

"고인의 뜻에 따라 조의금은 받지 않습니다."

만면에 가득 웃음을 띤 얼굴이 그대로 들어있는 영정사진이라 더 속이 아팠다. 나를 보자마자 아들마냥 반갑게 맞아주시며 내 밥벌이부터 염려해주시는 배 선생님 손이 따스했다. 대학 몇 년 후배 뻘인 둘째 아드님과 소주 한병을 나눠마시고 나왔다.
"단 한번도 의심하지 않고 늘 저를 믿어주셨는데, 그 믿음 만큼 잘 못산것 같아 어머님께 너무 죄송하다" 뭐 그런말을 들었던 것 같다. 많이 취했다. "한번의 의심없이 한결같이 믿어준 사람"이라는 말만 또렷이 머리에 박혔다.

한결같은 미소를 잃지 않고
한결같은 믿음을 주는 존재로 살아가고
기나긴 노동의 세월이 다한 다음, 나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일에 주저하지 않고
세상과 이별하는 순간까지 베품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나도 살고 싶다, 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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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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