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미래혁명을 상상하는 책 두권을 겹쳐읽었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다 읽고 보니 대비가 되는 면이 적잖아 나란히 감상을 몇자 적기로 한다.

<에코토피아 비긴스>는 작년 봄에 읽었던 <에코토피아>의 후속편이다.
<에코토피아>를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차에 헌책방에 헐값에 올라와있던 놈을 발견하고 낼름 사서 쟁여놓았다가 6개월 지나 읽었다. 양호한 편이다.
<...비긴스>는 전작 <에코토피아>보다 시간 상으로는 앞선 시기를 다루지만 몇 년 후에 쓰여진 후속편이다.
물론 소설이므로 다루는 시간순서와 쓰여진 시간 순서는 무관하다. 제목에 나타난대로, 미국 북서부에 분리독립한 새로운 공화국 <에코토피아>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탄생되었는지, 그 '시작'의 이야기를 다룬다.
<에코토피아>가 생태주의자들의 유토피아는 이러한 '모습'이 될 것임을 깃발처럼 선명하게 제시한 일종의 선언문이라고 한다면 <...비긴스>는 어떻게 그 모습에 도달할 수 있는지 방법론을 이야기 하고 있다.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낸 에코토피아 건설 '전략'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미 그 전작에서 발랄하게 차고 넘치는 상상력과 파격을 보여준 지은이 어니스트 칼렌바크는 두툼해진 후속편에서는 좀더 나아간듯하다. 방법론이나 전략문서라고는 했지만 20세기 혁명사처럼 뛰어난 혁명지도자와 강철같은 혁명조직이 과학적 사상으로 무장하여 진군했다더라~식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그가 그려낸 새로운 혁명의 특징을 몇가지 뽑아본다.

 
1. 생태주의 혁명정당은 완전히 새로운 조직노선을 따르고 실행에 옮긴다.
 - '생존자당'은 공화당/민주당의 양당구조 틈바구니에서 탄생했지만 그들의 룰을 받아들이고 게임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들의 비아냥따위는 무시해버리고 대신 기존 정치질서에 넌덜머리가 난 대중의 갈증에 적확하게 응답하는 실행프로그램으로 어필한다.
 - '우리의 지도자 OOO를 뽑아주세요, 그러면 다음 선거에서 세상을 바꾸어 드리겠습니다' 이런 투의 호소는 집어치웠다. "당신이 원하는 세상을 당신의 손으로 만드세요. 우리가 함께 할게요."라고 진심을 다해 말할 뿐이다. 선거와 공직 진출은 그렇게 '함께'세상을 만드는데 필요한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 질적으로 다른 집회문화를 창출한다.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은 30명 선이라 생각하고, 그 숫자를 넘는 집회와 모임을 지양한다. 물론 대중투쟁은 예외지만. 지도자는 물론 존재한다. 지도자는 수직적인 조직구조를 만들어 조직을 '관리'하는 대신 30명이 모이는 모임단위는 어디에든 직접 찾아가 대면해서 '직접 소통'한다.
 
2. 혁명의 근원지는 '마을'이다.
 - 이 소설의 주 무대는 미국 북서부 해안 마을 '볼리나스'다. 볼리나스는 시골 중의 시골이지만 현대 대도시의 삶을 의식적으로 거부한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 일종의 '귀농촌'이다. 자연의 흐름을 따르고 이웃과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그들이 새로운 대안의 씨앗을 만든다.

3. 생산력도 중요하다.
 - 소설에는 수많은 등장인물이 그 수 만큼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하나씩 들고 등장하는데, 주인공 '루 스위프트'가 기존 발전량의 10배이상을 생산하는 새로운 태양광 전지를 발명하는 스토리가 소설 전체의 중요한 뼈대를 이루고 있다.
 - 에너지기업에서 퇴출당한 기술자 3명이 설립한 풍력발전기 회사이야기도 나온다. 가족과 함께하는 생활과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의 조화를 꾀하는 이들은 사내 유치원을 만들고, 수유실을 만들고, 가족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고용의 유연성을 강조하고 복지지출을 사정없이 줄이는 대세에 맞서서!
 - 화석에너지와 원자력에너지를 거부하는 대신에 석기시대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태양광 발전과 풍력발전이 채택가능한 대안으로 제시된다.
 - 흥미로운 것은 저자의 통찰이다. 대안적인 에너지라도 그것이 거대기업이나 정부권력의 수중에 장악되어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철학이 드러난다. 주인공 루는 수많은 어려움을 뛰어 넘어 마침내 그(녀)의 새로운 발명이 모든 대중의 것이 될 수 있도록 '최대한 쉽게'그의 발명을 설명하고 보급하는데 혼신을 다한다.

4. 여성이다. 젊은이다. - 혁명의 주도세력
 - 생존자당에는 다양한 계급계층이 참여한다. 노조지도자도 있고 소농도 다수를 이룬다. 엘리트층을 이루는 것은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식으로 보면 '지식노동자'층이다. 비전도 없이 거대자본과 권력에 노예처럼 봉사하는 대기업을 박차고 나온 젊고 유능한 인재들도 다수 참여한다.
 - 돋보이는 것은 여성이다. 당수 '베라 올웬'도, 주인공 '루'도, 건물은 안 건드리고 사람만 죽이는 중성자폭탄을 패러디해, 사람은 아무도 다치지 않되 화학공장 건물의 작동만 망가뜨리도록 교묘하게 설계한 폭탄을 설치한 생존자당의 유일한 테러리스트 '로라'도 모두 여성이다. 그 여성들은 그 여성들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제대로 파악한 지혜로운 남성 동료/남편/애인들로부터 지지를 끌어내고 저마다의 성취에 이른다. 경쟁하거나 제압하는 방식이 아니고!
 - 베라올웬의 리더십도 특기할 만하다. 권위적이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상대방이 열정을 갖고 있는 주제에 대해 늘 함께 연구하며 그 열정을 꽃피우도록 북돋우는 베라의 모습은., 남성 혁명가들의 타입과는 참.. 다르다.

5. 가족, 함께 사는 방식의 변화.
- 다양한 대안가족의 모습들이 등장한다. 이혼한 아빠와 엄마 집을 며칠씩 오가며 사는 장성한 딸. 양성애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남자동료 1명, 여자동료 2명과 공동작업실+각자의 침실을 짓고 사는 미술가 엄마. 이혼 후에 큰 아들과 귀농을 선택한 중년 남성, 결혼과 가족을 선택하는 대신 숲속에서 동년배의 젊은이들과 - 히피처럼 - 자유롭게 살아가는 로라의 딸 등. 

6. 타격대상에 대한 분명한 제시
 - 자가용을 없앤다.를 열가지 강령중에 하나로 포함시키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인다.

위의 설정이 전혀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미 활력을 잃어버린 미국 자본주의가 보통의 미국인들의 모든 일상을 너무도 옥죄고 피폐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에서 제시되는 그럴듯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석유중독에 빠져 석유를 더 싼 값에 확보하겠다는 일념으로 전쟁도 불사하고, 더 많은 석유소비를 위한 법과 제도가 힘을 발휘하는 국가. 석유에 기반한 식품산업과 농업이 사람들의 건강을 치명적으로 위협하지만 돈으로 자신을 지킬 수 없는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속절없이 병에 걸려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이런 삶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틀렸어, 이런 체제속에서 이득을 얻는 건 오로지 소수 자본가와 권력자일 뿐이야, 깨끗한 자연과 신선한 공기, 이웃들 사이의 우애와 존경, 안전한 먹을 거리가 돈보다 더 소중해'
이런 평범하지만 자명한 진리를 더 이상 포기할 수 없다는 절박한 깨달음에 사람들은 하나둘 '변화'를 꾀하고, 그 중심에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꿰뚫고 새로운, 그러나 오래된 미래를 제시한 '생존자당'이 서게 된다. 국가가 그들을 적대시하고 탄압하려들자 그들은 마침내 국가마저 거부한다. 독자적인 헌법과 의회와 군대를 구성하고 독립한다. 에코토피아로!

80년대 초반, 레이건 집권당시 미국의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된 때에 발표된 이 책의 통찰은 20여년이 흐른 오늘날 훨씬 더 통렬하게 다가온다.

'생존자당'이 민주노동당과 읽는 내내 대비가 되었다.
민주노동당이 2004년 화려하게 진보정당 타이틀을 걸고 국회입성에 성공할 때 내걸었던 구호는 '판갈이'였다. '근본적으로'새로운 진보정치를 펼쳐보겠다는 야심, 그게 성공하길 빌었던 국민들의 높은 기대도 충만했다.
그러나 지난 몇년 동안 보여준 민주노동당 표 진보정치는 구호는 있었으되 그 구호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론에서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았던 것 같다. 거대한 적과 싸우는 동안 투쟁하는 기술은 많이 익혔으되 건설의 正positive한 에너지를 갖출 여유가 없었던 게 아닐까. 방법론이 부실하면, 수단이 왜곡되면 정당했던 목적마저 퇴색하기 마련이다. 수사는 급진적이었으나 - 분당이후엔 그마저도 사그라든 느낌인데 - 디테일한 수준의 당 활동내용, 조직활동 방식과 민주노동당식 선거운동 방식에 이르면 '근본적으로 새로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판을 갈아보려는 의기는 높이 살만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너무나 무거운 판에 깔려버린 상황이 아닌가.


먼저 본 책의 강한 여운이 현실의 답답함과 겹쳐진 불유쾌한 마음의 상태로 잡은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은 유토피아를 향한 꿈을 놓지 않은 자에게 '지금, 여기'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화두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밀고간 책이다.

초반부는 좀 실망스러웠다. <다현사> 이후 그의 책을 처음 만난 '일반독자'라면 모를까, <세바사>를 읽었으며 수다하게 많은 자리에서 저자의 글을 읽고 말을 들어왔던 나로서는 그닥 새로움이 없었다. 최근의 베네주엘라 혁명과 쿠바의 도시농업에 대한 관심까지도 익숙했던 터라, 프랑스혁명부터 21세기까지 거쳐오는 '혁명의 추억'은 새로울게 없었던 것이다.

뒷부분에 가서야 박세길 선배의 '독창성'이 발견되었다. 이 책과 함께 들려왔던 그를 둘러싼 풍문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에서 그는 북이 겪고 있는 오늘의 고난의 원인을 미제국주의의 강압으로 인식해온 전통적인 NL류의 그것과는 다른 관점에서 진단한다. 북의 경제침체와 활력을 잃어버린 사회를 바라보며,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채 여전히 수직적 위계주의 사회를 고수하는 북의 지도부에 책임이 있음을 주장한 대목은 많은 논란을 야기할만 하다.
수직적사회에서 횡적인 사회로, 귄위적인 영웅적 지도자의 시대에서 '창조적 다수'의 시대로 변화했다는 그의 통찰은 간명하다. 대중교육의 급속한 확대와 최근의 인터넷의 발달이 시대의 변화를 이끈 동력이라고 파악하는데, 역사발전의 원동력은 민중이며 계급투쟁이요, 사회 변화의 동학은 생산력/생산관계의 모순에서 비롯된다는 진보진영의 오랜 인식론에 충실하려 한 것일까, 간명하긴 하나 왠지 부족한게 있다. 창조적 다수로서의 젊은 세대의 가능성을 '개인주의적이나 블로고스피어에서 능란하게 소통할 줄 아는' 데서 찾는다는 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창조적 다수'라는 개념틀로 무리하게 현상을 해석하려 하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인간의 본성의 수준에서, 인간(됨)을 어떻게 정의내리고 추구할 것인가 하는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야 근본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비록 소설적인 상상력을 동원한 것이긴 하나 <...비긴스>는 인간 개인-(지역)공동체-사회-국가를 관통하며 '판을 갈아버리고 세우는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다양하고 다채롭게 보여준다. 

아쉬움과 깊은 공감은 계속 교차된다.
노동혁명-기업혁명-자본혁명-시장혁명으로 단계를 나누어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변화의 방향을 제시한 12장은 가히 역작이라 할만하다. 무지개처럼 다양한, 아니 다양할 수 밖에 없게 된 이 시대의 '진보'의 지표를 생태주의, 문화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의 4가지 키워드로 정리하고 그 가치들의 상호연관까지를 풀어 설명한 것 13장은 진보운동내의 '헌내기'들을 위한 '새시대 시각교정 커리큘럼'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겠다.
진보운동 내의 수직적위계와 권위주의를에 대한 그의 비판은 참으로 가슴아프게 날이 서 있었다. 알만한 사람들은(사람들만!) 다 아는 '위'와 '아래'의 변증법은, 그 용어를 재구성함으로써 낡은 원리로 무너지고 만다. 

"권위주의가 지배하는 수직적 위계질서에서는 위로 보고하고 아래로 전달하며 위는 명령하고 아래는 복종하는 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러다보니 오직 위에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면서 옆을 쳐다볼 겨를이 없는 사회가 되었다."

"수직적 위계질서에서는 자신의 아래를 만들고 이를 장악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수평적 소통과 연대 구조에서는 옆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소통하는 것이 더중요해진다. 같은 맥락에서 수직적 위계질서에서는 그 누구인가의 아래로서 관계가 '독점'되지만 수평적 소통과 연대구조에서는 다양한 사람의 옆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관계는 '공유'된다. /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변화된 환경에 맞게 조직 문화를 혁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내가 하고 싶었던 테마를 정통으로 건드려 말한 문장을 만나니, 시원하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어떤 면에서는 회사조직보다 훨씬 공고한 '수직적 위계질서'를 가졌던 지난 몇 년 사이의 경험이 떠올랐다. 만연한 아래를 향한 폭력의 조직문화도. 폭력의 문제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제 충분하므로 필요한 것은 새로운 건설의 담론이다. 문제제기는 적나라했으나, 건설에 대한 이야기가 쳐 놓는 그물은 참으로 성기다.

지역공동체와 대안의제네트워크가 씨줄과 날줄처럼 새로운 사회변화를 일구는 망net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엘리트 조직의 선도를 대신하는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판단에도 깊이 공감한다. 문제는 여전히 "지금, 누구와 함께 시작하지?"에 대한 답을 내리는 것이므로, 공감하는 만큼 또 공허하다. 책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12~14장의 서술어가 상당수 당위(~어야 한다)를 주창하는 어미임을 보는 것은 그래서 한편 좀 씁쓸하기까지 하다.


십오년전 그와 함께 만들었던 소책자의 제목이 "씨줄과 날줄"이었다. 이론의 씨줄과 실천투쟁의 날줄을 교직하고 또 재단하고 재봉하여, 이제 비로소 그만의 아름다운 옷을 한벌 지었다. 그의 고뇌가 만져질 것 같다.



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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