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환경고전으로 <침묵의 봄>, <도둑맞은 미래>, 그리고 이 책 <모래군의 열두 달>을 꼽는다고 한다.
대단히 빼어난 책이다. 번역서임에도 문장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번역도 괜찮다. 옮긴이 송영규는 전문 번역가가 아닌 환경학자인데, 위스콘신 모래벌에 마련한 낡은 오두막shack의 번역어로 '누옥'과 같은 격조있는 단어를 택한 걸 보면 연구만 잘 하시는 자연과학자는 아닌 듯 하나, 이 책이 도달한 '문학적 성취'는 무엇보다 저자의 탁월한 글솜씨와 철학적 깊이에 기댄다.

봄부터 뒤적거리다 미루어 두다 이제야 겨우 끝낸것도 그 때문인것 같다. 가벼운 에세이집으로 넘기기에는 메시지가 너무 강렬했다. 환경운동이 싹이 트기도 전인 1940년대에 저자는 이미 환경윤리-토지윤리에 대한 선구적인 통찰을 평생의 삶을 통해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던 또 하나의 이유는 시적이고 함축이 가득한 문장때문이었다. 김종철 교수의 '시적인간과 생태적인간'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독후 메모.

"자신의 좋은 참나무를 손수 베고 패고 옮기고 쌓아올린 사람이라면, 그러면서 아무 생각도 없지만 않았다면, 열의 근원에 대해 많은 것을 기억해낼 것이다.... 이 참나무는 살아남았고, 그래서 80년 동안이나 유월의 햇빛을 축적해 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흐뭇하다."  (27쪽)

"(강에서 떠내려오는 것을 주워 모은) 이 묵은 판자 자서전은 아직까지 대학에서 가르치지는 않지만 하나의 문학이다. 모든 강가 농장은 망치질이나 톱질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다. 홍수가 밀려오면 언제나 새 책이 도책한다." (48쪽)

"(잡초로 분류되는 '실피움'이 죽으면) 더불어 프레리 시대도 막을 내릴 것이다.... 내가 도로 보수반이 잡초제거라는 미명하에 역사책을 불태웠다고 말한다면, 듣는 사람은 놀라서 어리둥절할 것이다. 어떻게 잡초가 책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식물군에는 관심이 없는 기계화된 인간은 좋든 싫든 자신의 나머지 삶을 영위해야 할 땅을 갈아 뭉개는 데 이룩한 진보만을 그저 뽐낸다. 미래의 어떤 시민이 물질적으로 풍족한 자신의 생활을 위해 식물들이 치른 희생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하려면, 당장 모든 참된 식물학과 참된 역사의 교육을 금지하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르겠다." (73쪽)


"지금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서로를 절멸시켜온 무수한 동식물에게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자애로운 신의 섭리다. 지금 똑같은 섭리로 우리 인간에게도 역사 의식이 없다."  (77쪽)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직업으로 분류하는데, 직업이란 어떤 특정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거나, 파는 것이거나, 수리하는 것이거나, 날카롭게 하는 것이거나, 혹은 그렇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 가운데 하나다. 이같은 분업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것을 뺀 모든 도구의 오용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생각하고 원하는 바에 따라 사실상 모든 도구를 휘두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직업이 하나 있으니, 바로 철학이다. 철학은 이렇게 인간이 어떤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가치가 있는지 아닌지를 자신이 생각하고 원하는 방식에 의해 결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98쪽)


"소나무는 정부가 행정의 연속성을 얻기 위해 이용하는 장치인 '임기의 중첩'과 똑같은 방법을 통해 '상록수'의 영예를 얻었다. 매년 새로 자란 가지에는 새잎이 달리고 묵은잎은 더 긴 시간을 두고 떨어지기 때문에 무심한 사람들은 소나무 잎이 언제나 푸른 것으로 믿게 되는 것이다...
내가 종종 내 소나무들로부터 숲의 관리나 바람과 날씨에 관한 뉴스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을 얻는 때는 한겨울이다. 이런 일은 특히 눈이 내려 무관하고 자질구레한 모든 것들을 덮어버리고, 본질적인 비애의 침묵이 모든 생명체를 짓누르는 찌푸린 날 저녁에 곧잘 일어난다. 그런 저녁에도 내 소나무들은 눈을 덮어쓴 채 쇠꼬챙이처럼 곧게 줄지어 서 있다. 나는 그 너머 어스름 속에 수백 그루의 소나무가 더 서 있음을 안다. 이럴 때 나는 신기하게 소나무의 용기가 내게 전이됨을 느낀다."  (119쪽)


"모든 야생 보전은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슴에 간직하기 위해서는 보고 쓰다듬고 해야하는데, 충분히 보고 쓰다듬은 다음에는 아무런 가슴에 간직할 원생지대가 남지 않기 때문이다."  (133족)


"다윈이 처음으로 종의 기원에 대해 얘기한 지 한 세기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앞서간 세대들이 알지 못했던 것을 알고 있다. 인간은 진화의 오디세이에서 다른 생물들의 동료 항해자일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 새 지식을 통해 지금쯤 우리는 동료 생물들을 친족처럼 생각할 줄 알아야 했다. 함께 사는 삶에 대한 희구, 생명 세계의 장엄함과 영속성에 대한 경외감도 함께 말이다.
다윈 이후 한 세기 동안 무엇보다도 우리는, 인간이 비록 지금 탐험선의 선장이지만 결코 그 탐험의 유일한 목적이 될 수 없으며,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이전의 가정들은 두려움을 감추어야 하는 단순한 필요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감히 말하건데, 우리는 이런 것들을 알았어야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실제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한 종이 다른 종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하늘 아래 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비둘기를 잃은 우리는 그것을 애도한다. 만일 그 장례식이 우리들 자신의 것이었다면, 비둘기들은 결코 우리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다. 뒤퐁 씨의 나일론이나 바네바 부시씨의 폭탄보다도 바로 이 사실에, 우리 인간이 금수보다 낫다는 객관적 증거가 있다." (143족)


"목장에서 늑대를 쓸어내는 목동은 자신이 그 목장의 소 떼를 알맞은 숫자로 조절하는 늑대의 역할을 아울러 제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산처럼 생각할 줄 모른다. 그래서 우리에겐 흙먼지 푸석거리는 땅과 미래를 바다로 휩쓸어가버리는 하천만이 남게 된다" (169쪽)

"교육이란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대가로, 한 가지를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199쪽)

"골프장이나 관광단지와 비교하면, 원생지대는 레크리에이션 수용 능력이 작기 때문에 원생지대 스포츠는 '비민주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같은 주장의 기본적인 잘못은 대량 생산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 것에 대량 생산의 철학을 적용하려는 데 있다. 레크리에이션의 가치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레크리에이션의 가치는 그 경험의 강렬함과 그것이 일상 생활과 구분되고 대조되는 정도에 정비례한다. 이런 기준에 볼 때 기계화된 야외 행락은 기껏해야 맥빠지는 일이다."  (236쪽)

"윤리의 발전은 철학 용어뿐만 아니라 생태학 용어로도 기술할 수 있다. 생태학적으로 윤리란 생존 경쟁에서 행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윤리란 사회적 행위와 반사회적 행위를 구분짓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대상에 대한 두 가지 정의일 뿐이다.

최초의 윤리는 개인간의 관계를 다루었다. 뒤에 개인과 사회의 관계가 덧붙여졌다. 그러나 아직까지 인간과 '토지 및 그 위에서 살아가는 동식물'과의 관계를 다루는 윤리는 없다. 토지는 아직 재산이다. 토지와의 관계는 오로지 경제적인 것으로, 특권을 수반할 뿐 의무는 갖지 않는다.

윤리가 인류 환경의 이 세번재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은, 진화론적 가능성이며 또한 생태학적 필연성이다. "
(245쪽)

"토지 윤리는 공동체의 범위를 토양, 물, 식물과 동물, 곧 포괄하여 토지를 포함하도록 확장하는 것이다. 토지 윤리는 인류의 역할을 토지 공동체의 정복자에서 그것의 평범한 구성원이자 시민으로 변화시킨다. 토지 윤리는 인류의 동료 구성원에 대한 존중, 그리고 공동체 자체에 대한 존중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246쪽)
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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