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는 <지구영웅전설>로 처음 알게 되었다.
파격적이고 'B급'을 자처하는 듯한 독특한 스타일에 매료되었다.
유명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아직 읽지 못했으나, 이후에 나온 <카스테라>,<핑퐁>을 모두 찾아 읽었다.

2009년 작,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어제 다 읽었다.
과연, 박민규 이름 값을 하는 작품으로 손색이 없었다.


1. 박민규는 그동안 주류에서 비껴서 있는 인물들에 천착해왔다. 이 소설에서도 그의 관심사는 여전하다. 이번 작품에 등장한 '소수자'는 못생긴 여자다. 못생긴 여자에게 끌리는 '훈남'의 심리를 아주 세심하게 그려내는 그는, '과연 내가 추녀라도 당신이 나를 사랑했을까'라는 어려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성실하고 진지하게 탐색을 한다.
흥미로운 건 '추녀와 미남의 사랑이야기'라는 의도적이며 특수한 설정으로부터 보편적인 인간관계와 사랑, 인생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을 이끌어냈다는 점이다. 40대에 접어든 작가의 성숙함일 터이다. 비주류의 편에서 세상을 읽고 소설속에서 발언해온 그답게, 겉껍데기 모습에 얽매여 인생을 낭비하고 상대에 상처를 주는 역겨운 세상에 대한 신랄한 똥침도 여전하다.


2. 나보다 세살위인 작가이기때문에 공감이 더 많이 가는 것일 터, 작가는 세 주인공이 사랑을 키워가던 서울 변두리 어느 골목의 80년대 중반 풍경을 성공적으로 복원하고 있다. 늘 퇴근길에 들러 치킨과 맥주를 마시던 술집의 이름은 'KFC'가 아닌 '켄터키 치킨'이다. 치킨 집 문 옆 입간판에 써 있는 '맥주'글씨 아래엔 영문 BEAR (Beer가 아니고!)가 붙어 있고, 입간판 반대편에는 큼지막한 '호프' 아크릴 글씨 아래 HOF대신 <HOPE>가 양각되어 있다.
실내엔 켄터키 옛집일 듯한 사진이 걸려있으나 자세히 보면 네덜란드이고, 스와니 강일 듯한 사진은 아마존이었다.
닭을 튀기는 주방 근처엔 새끼 돼지들이 줄줄이 엄마 돼지의 젖을 문 그림이 걸려 있고, 켄터키의 어떤 것도 찾을 수 없는 가게 출입구 위엔 갓이 걸려있다. 실내엔 탐 존스의 '그린 그린 그래스 오브 홈'이 흘러 나오고! 푸하핫!!
그 시절을 주인공은, 혹은 작가는 "난데없는 희망이 그토록 우리의 가까이에 있던 시절이었다"고 추억한다.


3. 이건 새롭게 깨닫게 된 건데, 여느 작가가 그러하지 않겠냐마는, 박민규도 언어 자체에 대한 관심이 꽤나 높은 것 같다. 단어의 반복에서 생기는 경쾌한 리듬감을 즐기는 것 뿐만 아니라 이번 작품에서는 의도적인 줄 바꿈을 통해 솜씨좋게 묘사해놓은 그 시절의 풍속화에 화려한 채색까지 보태는 것이다. 입담이 보통이 아닌 뛰어난 재담가임은 그의 초기작부터 증명했던 바였으나, 막힘 없이 유장하게 흐르는 그의 말 잔치는 세세하게 심리를 묘파하는 순간에 임하여 빼어나게 아름다운 문장들로 이어진다.


돈 주고 산 책이라면 밑줄을 죽죽 그으며 읽었을 터이나, 도서관에서 빌린 터라 애꿎은 포스트 잇 여러장을 낭비하며 메모해둘 쪽들을 표시해가며 읽었다.


그 때 알았지. 인간의 영혼은 저 필라멘트와 같다는 사실을 . 그게 꺼지면 끝장이야. ... 빛을 발하는 인간은 언제나 아름다워. 빛이 강해질 수록 유리의 곡선도 전구의 형태도 그 빛에 묻혀버리지.... 전기가 들어오면 누구라도 빛을 발하지. 그건 빛을 잃은 어떤 전구보다도 아름답고 눈부신 거야. 그게 사랑이지.
누구나 사랑을 원하면서도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서로가 서로의 불 꺼진 모습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야. 붉을 밝혔을 때의 서로를.. 또 서를 밝히는 것이 서로서로임을 모르기 때문이지.
가난한 이들이 도리어 독재정권에게 표를 주는 것도, 아니다 싶은 인간들이 스크린 속의 인간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헌납하는 것도 모두가 그 때문이야. 자신의 빛을,.. 그리고 서로의 빛을 믿지 않기 때문이지. 기대하지 않고... 서로를 발견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야. 세상의 어둠은 결국 그런 서로서로의 어둠에서 시작돼. (186쪽)

누구나 그럴 듯한 학교를 나오고, 그럴 듯한 직장을 얻고, 그럴 듯한 차를 굴리고, 그럴 듯한 여자를 얻고, 그럴 듯한 집에서 사는,,, 그럴 듯한 인간이 되고 싶은 시절이었다. 그럴 듯한 인간은 많아도 그런, 인간이 드문 이유도... 그럴 듯한 여자는 많지만 그런, 그녀가 드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그럴 듯한 것은 결코 그런, 것이 될 수 없지만  (196쪽)

(두시간 줄서서 5분 타는 놀이기구 줄 서기를 포기한 후) 그럴 듯한 인생이 되려 애쓰는 것도 결국 이와 비슷한 풍경이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이왕 태어났는데 저건 한번 타봐야겠지, 여기까지 살았는데... 저 정도는 해봐야겠지, 그리고 긴긴 줄을 늘어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버리는 것이다. 삶이 고된 이유는... 어쩌면 유원지의 하루가 고된 이유와 비슷한 게 아닐까, 나는 생각했었다.... 나, 자기가 말이야... 여기까지 와서 열차도 안타고 가면 어떡해... 봐, 남들 다 타잖아... 이러는 사람이 아니라 참 좋아. (201쪽)

사랑은 상상력이야. 사랑이 당대의 현실이라고 생각해? 천만의 말씀이지. 누군가를 위하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 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시시해질 자신의 삶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지. 신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어. 대신 완전해질 수 있는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었지. (228쪽)

숨을 쉬고, 일을 하고... 귀찮아도 밥을 먹고, 견디고... 잠을 잔다. 그리고 열심히 산다, 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삶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랑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무료, 해도...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인간들은 생활을 하며 살아간다고 나는 믿었다. 무료하므로 돈을 모으는 것이다... 무료해서 쇼핑을 하고, 하고 , 또 하는 것이다... 큰소리치는 인간도... 결국 독재를 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도... 실은 그래서 사랑에 실패한 인간들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문득, 이별이 인간을 힘들게 하는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사라졌다는 고통보다도, 잠시나마 느껴본 삶의 느낌... 생활이 아닌 그 느낌... 비로소 살아 있다는 그 느낌과 헤어진 사실이 실은 괴로운 게 아닐까... (300쪽)










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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