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도,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란 부제를 가진 이 책도 진즉부터 눈여겨 보다 헌책방에서 싸게 나온 맛에 구입해 얼마전에야 읽다.
좋은 책이다. 진솔하게, 엉터리 없이 본말이 전도된채 공부를 강요당하는 독자들의 눈높이에서 어렵지 않게 참다운 공부의 이론과 실제를 권하는 작가 고미숙도 참 괜찮은 사람이다.
대학입시 경주선을 막 출발한 조카 정수가 요즘 고생이다. 이야기 중에 이 책을 권했더니 관심을 보이길래 주말에 건네주기로 했다. 메모 없이 떠나보낼 수 없어 미루던 독후 메모 몇자 적다.


(세상은 바뀌었어도 여전히 전쟁터인 학교와 교육에 대해) 그 누구도, 어떤 청소년도 이런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 그게 더 끔찍한 일이다.

공부란 세상을 향해 이런 질문의 그물망을 던지는 것이다. "크게 의심하는 바가 없으면, 큰 깨달음이 없다."(홍대용) 고로, 질문의 크기가 곧 내 삶의 크기를 결정한다!

왜 호모 쿵푸(功夫)스인가. 공부는 몸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기는 하되 몸을 단련하고, 인생을 바꾸는 공부를 해야한다.

연령별 균질화가 만들어 낸 가장 심각한 망상은, 학교를 떠나는 순간 공부는 '이제 끝!'이라는 생각을 각제 한다는 것이다. 공부는 다 때가 있어! 라던가, 이 나이에 무슨 공부? 등등. 이 모두는 공부는 오직 학교에서 하는 것이라는 주술에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이건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다. 인간은, 아니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뭔가를 배운다.

근대 이전만 해도 10년, 20년 사이는 얼마든지 벗이될 수 있었다. 그런데 학교제도가 연령별로 세대를 잘게 쪼개놓은 탓에 나이주의는 삶에 심각한 폐해를 가져왔다. 세대간 장벽을 허물어뜨리는 운동이 시급하며, 10대와 6,70대가 함께 지속적으로 어울릴 수 있는 활동은 공부가 최고다.

공부는 독서다.

공부는 네트워킹이다.


공부란 잘 배우는 능력에 다름 아니다. 공자와 순임금이 위대한 성인이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위대한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싶어던 건 어떤 구체적 이념이나 원리라기보다 배움의 열정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계몽이 아니라 촉발, 훈계가 아니라 감염. 이것이 동서고금의 위대한 스승들이 취한 최고의 교육법이다.

"사나이의 가슴 속에는 늘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기상이 있어야 하며, 건곤을 작게 여기고 우주를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여겨야 옳다." (선인들의 공부법) 배움이란 이런 천하를 가슴에 품고 나아갈 떄에야 삶의 지혜와 문명의 비젼으로 이어진다.

스승이란 무엇인가? 가장 열심히 배우는 이다. 배움을 가르치는 이, 배움의 열정을 촉발하고 전염시키는 베움의 헤르메스, 그가 곧 스승이다.

미숙한 영혼의 소유자는 그 자신의 사랑을 세계속 특정한 하나의 장소에 고정시킨다. 강인한 자는 그의 사랑을 모든 장소에 미치고자 한다. 완벽한 자는 그 자신의 장소를 없애버린다.

완벽한 독서를 희망하는 자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이국의 땅이 되어야 한다. "나는 모른다. 도대체 어떤 감미로움이 사랑을 고향으로 이끌어가는가? 그리고 고향을 결코 잊지 않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 현명한 사람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고향에 이별을 고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12세기 독일 출신 신학자 성 빅토르 위그)

공부하는 이들은 고향을 떠남과 동시에 '반-기억'(counter-memory)을 수행하여야 한다. 일종의 망각 능력으로 과거를 몽땅 지워버리는 식이 아니라 어떻게 과거의 기억을 삶의 새로운 배치속으로 밀어넣느냐 하는 것이다. "건강한 자에게 기억은 '약속할 수 있는 능력', 곧 '의지의 기억'이다. 자신이 의욕한 것을 잊지 않고 계속 밀어붙이는 능력, 그 때문에 그의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고병권)

공부란 특정한 시공간에 고착되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존재로 변이되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의 변이를 통해 세상의 질서와 배치를 바꾸는 것, 거기가 바로 공부가 혁명과 조우하는 지점이다.

왜 사파티스타인가? 그들은 노동자도, 컴퓨터 기술자도 아닌 정글의 원주민이다. "그들은 이 지구 상에서 '가장 억압받고', '가장 소외되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래버)

억압으로 인해 소외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즉 삶에 대한 통찰이 수반된다면 지독한 억압을 당하는 처지라 하더라도 소외를 극복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인생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탐구하는 공부, 이 공부를 통해 삶을 통찰하는 힘이 생길 때 비로소 존재의 근원적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 소외되지 않는 자만이 구조적 억압에 맞서 싸울 수 있다.

어느 가게의 한 통 속에 들어있는 뱀장어를 보았다. 포개지고 뒤얽히고 짓눌려서 곧 숨이 끊어져 죽을 것 같았다. 이떄 홀연히 한 마리의 미꾸라지가 상하좌우전후로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움직이니 마치 신룡과 같았다. 뱀장어들은 미꾸라지에 의해서 몸을 움직이고 기가 통하게 되었으며 생명의 기운을 되찾을 수 있었다.
뱀장어의 목숨을 건진 것은 모두 미꾸라지의 공인 것이 틀림없으나 그 역시 미꾸라지의 즐거움이었다. 결코 뱀장어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또 뱀장어의 보은을 바라고 그렇게 한 것도 아니다. 스스로 그 본성에 따른 것에 불과하다.  (왕양명의 수제자 왕심재의 '추선부' 한 대목)

호모 쿵푸스의 공부법!
 - 책을 읽어라. 특히 원대한 비전, 눈부신 지혜로 가득 찬 고전을 섭렵하라.
- 소리 내어 암송하라. 소리의 공명을 통해 다른 이들과 접속하라.
- 사람들 앞에서 구술하라. 지식과 정보에 서사적 육체를 입혀라.
- 앎의 코뮌을 조직하라. 즉 스승을 만나고 벗과 함께 공부하라.
- 일상에서 공부하라. 질병과 사랑, 밥과 몸, 모든 것을 책으로 변환하라.
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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