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쪽이 넘는 분량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8월 25일에 도서관에서 빌어와 한달이 넘도록 붙잡고 있다가 오늘에야 끝을 보았다.

고교시절 과학시간에 배운 짧은 지식외에는 다윈의 생애와 이론에 대해서 한번도 제대로 독서를 해 본적이 없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서 책을 빌어왔다. 책의 두께도 힘들었지만 그닥 익숙치 않은 19세기 영국지식사회의 풍경을 이루는 방대한 사실과 에피소드가 쉬 지루해져서 더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이렇게 책을 쓰는 방식은 영국인들의 특징일까?

도서관 반납일을 3주나 어긴탓에 당분간은 대출이 안되게 생겼지만, 지루함을 견디면서 읽은 값어치는 충분했다.

새로이 알게 된 사실과 생각해 본 주제들 :

1. 1809년에 태어난 다윈은 그의 나이 서른인 1839년경에 진화론-자연선택설의 개요를 요약 정리한다. 그런데 그가 <종의기원>을 출간하여 그의 이론을 세상에 알린 것은 20년이 지난 1959년이었다.
지금이야 초등학교 과학교과서부터 철저한 진화론에 입각하여 지질학과 생물학의 기초를 가르치니까 진화론을 자명한 사실로 생각하지만, 150년전 영국사회의 분위기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19세기 중반은 자연과학과 기술의 눈부신 발전의 한가운데였다. 하지만 다윈과 라마르크같은 그의 선배 과학자들이 진화론을 정초할 당시에는 기독교 세계관의 위세가 여전했을 때였다. "인간과 원숭이의 조상이 같으며, 종의 변형은 환경에 적응하려는 생물의 치열한 생존경쟁 가운데 '우연'하게 벌어진 자연의 선택에 따른 것이다"는 주장은 너무나 위험했다.
19세기 영국의 과학계를 좌지우지하는 권위는 이른바 '옥스브리지'(캠브리지-옥스퍼드 대학)에서 비롯되었으며, 두 대학은 가장 보수적인 성공회교회의 기풍을 담지하고 있는 거점이었다. 이들의 눈밖에 나는 튀는 주장은 한마디로 자살행위와 다름없었다. 비글호를 타고 5년간 세계여행을 하며 20대에 전도유망한 젊은 과학자로 학계의 인정을 받은 다윈이 그런 위험한 사상의 주창자자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힌다는 것은 이후의 인생을 고난한 길로 몰고 가겠다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물론, 모든 과학자들이 다윈처럼 입조심을 한 것은 아니었다. 네안데르탈인 화석연구로 이름을 떨친 또다른 진화론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는 '싸움닭'이었고, 다윈과 자연선택설 논문을 공동 발표했던 윌리스는 맹렬한 사회주의자이기도 했다.
20년이나 진화론을 묵혀두었던 것은 혁명적 과학사상의 창시자였지만 급진적인 사회개혁보다는 안정속의 개혁을 추구했던 자산가 계급의 일원이었던 그의 계급적 기반에서도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다윈이 비글호 항해에서 돌아와 정력적으로 그의 이론의 기초를 쌓아올리던 때는 1840년대 후반이었다. 1848년 혁명의 광풍이 전 유럽을 강타하던 시기, 그의 연구실 앞으로는 차티스트 운동의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하며 목숨을 건 투쟁을 하던 분위기였다. 평등과 공정한 분배를 정당화하는 사상을 필요로 했던 혁명가들에게 진화론은 매우 매력적인 과학이론이었다. 그리고 진화의 방향은 '더 높은 곳을 향한 발전-진보'라는 목적성을 가져야 했다. "유구한 세월동안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역사는 발전과 진화를 거듭해왔다. 미천한 짐승과 인간형상을 하고는 있으나 열등한 종인 '흑인', 가난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평범한 보통사람들과 특권층으로 나뉘어 있는 세상의 질서는 신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동등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연이 진화해온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불평등한 사회체제는 진화할 것이다"
이런 설명 말이다. 곧 인간의 진보/사회체제의 변혁이라는 '바람직한' 목적과 방향에 진화론을 접목하려는 시도다. 그런데 다윈은 이런방식으로 변혁이론에 어설픈 진화론이 접목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는 검증되지 않은 가설은 결국 추론일 뿐 과학이 아니라는 굳은 신조를 가진 과학자였지 혁명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목적을 가진' 신의 설계로 세상이 만들어진것이라는 창조론의 기초를 수십년동안 철저하게 허물어버린 그에게 신 대신 등장한 자연이 '목적과 방향을 지니고' 진화과정을 이끈다는 설정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변화는 목적성을 갖지 않는다. 종의 역사속에서 '우연하게' '선택'되는 것이었다.

1860년대 어느날 맑스는 <종의기원>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진화론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중요한 이론으로 세계의 변혁에 기여한) 다윈의 공을 높이 평가하는 편지를 그의 저작 <자본>과  보내기도 했다. 이에 대한 다윈의 반응은, "자본은 참으로 대단한 작품이나, 사회개혁에 대해 나와 그는 생각이 많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 20년 동안 다윈은 단 한번도 자신의 적을 잊은 적 없이 때를 노리며 이론을 증명할 방대한 증거들을 차곡차곡 구축했다. 한편 후커, 헉슬리 등 당대를 풍미했던 일군의 '다위니스트'들 또한 자신들의 종교 다위니즘의 교주가 세상에 등극할 날을 숨어서 기다리는 대신 학술잡지 지면과 논문상에서 벌인 전방위적인 싸움으로 그 시기를 '만들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20년만에 성공했다. 옥스브리지를 위시로 결국 구 체제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 구세대의 과학자들은 몰락한다.

오래 전 읽었던 <과학혁명의 구조>가 떠올랐다. 과학이론은 점진적으로, 또 과학자사회 내부의 연구와 토론만으로 발생하고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 찰스다윈의 진화론이 주류가 되는 20-30년은 구 체제의 소멸을 지연시키는 마지막 상부구조 장치인 기독교사상의 파멸을 결과한 근대 과학 최후, 최대의 대 사건이었던 것이다.


2. '작은 것에 거대한 체계를 설명하는 열쇠가 담겨있다'
다윈보다 나이는 몇 살 아래지만 수십년동안 그의 곁에서 그가 정리하는 논문의 초고를 검토하고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후커의 지적에 자극을 받아 다윈은 성급하게 진화론을 발표하기보다는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8년에 걸친 따개비연구였다. 오로지 '따개비'라는 작고 보잘것없는 한가지 종을 주제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8년의 고단한 세월을 보낸 끝에 다윈은 비로소 학계로부터 생물학-비교해부학 권위자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 이전까지 다윈은 생물학자라기보다는 지질학자에 가까왔다. 5년동안 비글호를 타고 항해하며 가지고 온 수천종의 동식물 화석연구와 해안선 지층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로 과학계에 입문한 것이었다. 섣불리 생물종의 변형에 대한 이론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대응을 값어치조차 없는 얼치기의 주장으로 치부될 수 있다는 것이 후커의 조언이었고, 그 조언을 따른 다윈은 비로소 룰이 있는 게임의 장 안에 들어와서 발언할 권리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늘 정치와 경제에 대한 관심을 놓지는 않았지만 사교와 토론보다는 런던 근교의 시골에서 평생 소박한 연구로 일관한 다윈은 자신의 이론을 증명할 여러가지 작은 개체와 종에 대한 연구로 인생의 대부분을 바쳤다. 비둘기, 산호, 꽃의 수술과 암술에 대한 연구 등. 그의 만년에 집을 방문한 독일 혁명가들은 다윈이 지렁이를 연구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그가 '농민계급'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들이 파내는 흙과 흙 속에 있는 가장 미천한 존재인 지렁이 따위에 시간을 보내는 것에 기가 막혔던 것이다. '작은 것에 거대한 체계를 설명하는 실마리가 있다'는 것이 그의 화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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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20대 초반, 감옥에 가는 선배들을 보며 내가 아는 한 가장 높은 기품을 가진 인간들이 선택하는 고통에 충격을 받았다. 한국 현대사를 읽으며 나를 기른 이 사회가 20년간 내 머릿속에 주입해 온 것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데 절망했다. 경제사를 읽으며 인간의 역사는 진화(?!)와 진보를 거듭해 온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며 자신감을 가졌고, 맑스와 레닌의 이론을 접하며 비로소 거꾸로 뒤집어진 세상을 바꾸는 무기를 가지게 되었다는 데 감동했다. .. 스테레오 타입이었다. 한 참 후에 맑스레닌주의가 소비에트 정권에 의해 상당히 윤색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는 했지만.
무기를 가진 혈기 방정한 나는 전투의 현장이 필요했다. 내 무기가 과연 제대로 정비가 되어 있는 건지, 시대에 뒤쳐진 구식 장총은 아닌지, 내가 나갈 곳이 전장이라면 적군과 아군은 어떻게 구분되는 지, 그것이 복잡하다면 복잡한 '전선'속에서 택해야 할 효과적인 전략과 전술은 무엇인지 따위, 학습의 과제도 알게 되었으나 내게 급한 건 전투였다.
내 무기를 사용해 한놈이라도 적군을 사살하고 싶었다.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적개심을 표출해야 했다. 

그런데 전선이 생각보다 아주 복잡하다는 것은 금새 깨닫게 되었다. 내게 주어진 전선은 대개 사상투쟁전선이었을 터, 눈에 띠는 까다로운 상대는 나를 소중히 여기나 나와는 생각이 많이 다른 부류였다. 부모님, 대학 이전의 친구들이 그들이었고, 지나 놓고 보면 이 전투에서 나는 그닥 성공적이지 못했다. 오히려 내가 전선에 있음을 까맣게 잊는 쉬운 방법을 택했고, 내 눈 앞의 적은 불쌍한 의경 나부랑이로 실체가 드러나는 '노태우 정권'이거나 부평 미군기지 굳게 닿힌 철문뒤에 있는 '미제국주의자'가 되는 것이 손쉬웠다.
이들과의 전투는 기실은 내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나는 내 무기를 점검하는 일의 소중함은 아예 잊게 되었다. 학교다닐 때 배웠던 이론, 사회운동을 하며 다시 복습하는 변혁론이 현실에 대한 설명력을 잃어버렸어도 별로 위태로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때때로 난감하게 만드는 상대를 대할 때가 간혹 있기는 했다. 실물경제에 대한 지식과 이해의 폭이 나와 비교조차 되지 않게 높고, '저인간은 자본가 편일 거야'의심은 가지만 당장 사회운동가가 아니라는 것외에는 비난할 수도 없는, 학생운동을 그만두고 대기업에 취직한 일군의 부류들이 그들이었다. 후원금을 요청하느라 그들을 만날 때 그들이 다루는 현실의 복잡함을 답할 내공은 내겐 없었다. 힘들었고 시간이 좀 더 지난 후, 나는 또 하나의 손쉬운 길을 선택했다. 이런 부류를 아예 안만나고 살기.

마주치는 현실을 내가 가진 이론이 설명하지 못할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끝없이 해법을 모색하고 새로운 차원에서 해석하며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할 수 있어야 우리는 그 담론체계에 과학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현실과의 치열한 접점을 포기하는 순간 그건 더 이상 과학이 아니다. 따라서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과거 내가 좇았던 경향은 과학을 곡해하고 있었거나 룸펜 사회주의자의 말장난이었거나 였다.

따개비에만 8년을 보내고, 죽기 바로 전해 40년동안 관심을 가져왔던 지렁이에 대한 책으로 엮어내고야 만 다윈의 열정은 자신의 이론이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들이 '믿는' 잡설로 전락하는 것을 끔찍하게 경계했던 과학자로서의 엄격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3. 관행에 얽매이지 않았던 다윈의 파격적인 연구방법
 
비글호 항해=(갈라파고스 섬+이구아나와 핀치새)=종의 기원 탄생
이런 등식이 아니었다. 5년 동안 이어졌던 비글호 항해는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 해안, 남태평양 곳곳의 섬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세계일주 여행이었다. 갈라파고스 섬에 다윈이 머물렀던 기간은 그 중에서 아주 짧았다.
물론 섬마다 다른 모양으로 분화된 핀치새의 종변형이 이후 다윈의 자연선택설에 결정적인 힌트가 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한참 후의 이야기. 다윈이 이 항해를 마치자마자 학계의 주목을 받는 기린아로 화려하게 등장한 것은 그가 수집해서 영국의 박물관으로 쉴 새 없이 실어날랐던 엄청난 양의 동식물 표본과 화석 때문이었다. 오래 전에 멸종한 코끼리모양의 동물 '마스토돈'의 화석을 처음 발견한 것도 바로 다윈이었다.
동물해부기술과 식물분류에 대한 기본기를 갖추었으며, 지질학 연구방법을 잘 알고 있는 특이한 연구자가 5년이나 전세계를 돌아다닌 것은 천재과학자의 시대 19세기에서도 최초로 있었던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사냥과 동물표본 수집에 광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었던 터라 5년이나 이어졌던 지루하고 위험한 항해는 다윈에게는 흥미진진한 시간이었고, 그의 위대한 자질은 5년동안 수집한 엄청난 양의 정보로부터 진화론의 실마리를 이끌어냈다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건강이 좋지 못했던 다윈은 - 실망스럽게도 - 이후에는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여행은 더 이상 시도하지 않는다. 다만 고상한 척 하지 않고 자신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떤 시도는 마다하지 않았다. 자연선택을 증명하기 위한 사례를 고민하면서, 자연스럽게 '인간에 의한 선택'이라 할 수 있는 동식물 품종개량에 눈을 돌리게 된다. 19세기 중반 영국 중하층류 남성들의 취미였던 애완용비둘기에까지 관심이 미친 다윈은, 이에 대한 정보를 더 맣이 얻기 위해 하층계급들이 주로 다니는 펍에 뻔질나게 출입하는 일도 마다 하지 않았다.
완벽주의자의 성격탓에 어떤 주제던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모아서 반론의 여지가 없도록 이론의 성채를 구축해나갔던 다윈.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으므로, 전 세계와 다양한 계층의 지인들의 도움은 그의 연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했고, 그 도움을 잘 이끌어낸 것 또한 그의 탁월한 장점이었다.



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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