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큰 애가 좋아하는 어린이 잡지 <고래가 그랬어>의 발행인, 자칭 'B급 좌파' 김규항이 단행본을 냈다.
그 제목이 요상했다. 예수전이라.
왜 그가 성경을 다시 읽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 다른 신학자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세상을 이해하고 바꾸는 길을 탐색하는데 제대로 급진적인 관점의 정수를 잘 보여준 책이다.

그의 거침없는 일갈에 매료되어, 책장을 연지 이틀만에 독파하다. 물론, 그렇게 읽어제낄 책이 아니고, 그럴 주제도 아니라는 생각이 이어졌다. 메고 다니는 서류가방에 철지난 유인물 한장을 잘게 찢어 인상깊었던 문장이 있는 책갈피마다 끼워두었다. - 도서관에 빌린 책이었으므로.

대중과의 소통을 포기하고 제 신념을 사수하는 데 몰두하는 사회변혁을 생각하는 사람들.
도사의 얼굴로 사회구조가 변혁되어도 소용없다고 툴툴거리는 그들의 옛 동료들.
대중의 욕망은 합리적이라고 떠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혼합을 주장하는 어떤 사람들.
그 욕망이 문제라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근대의 쌍생아라고 막말하는 또 다른 어떤 사람들.

그들을 바라보며, 그들 옆에서 자신을 함부로 부리지 않고 '이건 아닌데'라고 되뇌며 조용히 실마리를 모색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단다. 김규항이 발견한 예수는, 놀랍게도 2000년 전 인물이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맞닥뜨린 문제에 대해 이미 말하고 있었단다.

김규항이 말하는 '어떤 사람들'속에 내가 끼어있는 것 같아, 낯뜨거워졌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삶의 기쁨과 의미를 회복하도록 돕는 이가 바로 예수이므로 예수를 다시 읽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 공감했다.


눈으로 그은 밑줄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의 '죄인'은 누구인가, 이 완전한 물신의 세상에서 '율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경제적 경쟁력'이다. 경제적 경쟁력을 갖지 못한 사람은 곧 죄인이다. 2000년 전 죄인들이 '율법을 지켜야만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듯, 그들 또한 '경쟁력이 있어야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현실에 체념한다. (49쪽)

예수는 생의 마지막 며칠을 내내 갈릴래아 시골 마을로만 돈다. 이런 예수의 활동방식은 더 많은 사회적 영향력을 갖기 위해 되도록 크고 번성한 지역으로 활동영역을 넓혀 가려는 사회운동의 일반적 속성을 거스른다.
운동이란 기존의 사회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이지만, 운동이 갖는 숙명적인 모순은 기존의 체제와 사고방식에 깊이 물들어간다는데 있다. 운동의 외형적 성장을 추구한다. 그것은 정체성의 훼손과 비례하고 사회체제에 포섭되어 가는 과정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운동의 진정한 성장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예수는 운동의 외형적 성장에 관심이 없다. 예수는 오로지 제 운동, 즉 '하느님 나라 운동'의 본디 목적과 내용에만 집중한다. 고통받는 인민들이 갈릴래아 시골에 많이 살았기 때문에 예수는 시골마을로만 돌았다. 그러나 예수의 흐트러짐 없는 활동은 결국 그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어 사람들에게 울림을 준다. (62족)

믿는다는 것은 욕망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식이다. 오늘 사회의식을 가졌다는 많은 사람들은 입만 벌리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말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극복될 수 있다는 건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다. 실은 그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은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반대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를 진짜 극복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의 지난함, 그 극복이 가져올지 모르는 얼마간의 기득권과 사회적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감수하기보다는, 자본주의 체제의 한구석에 끼어 안온하게 생을 보내는 일을 분명히 선택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힘은 되지도 않는 논리로 제 탐욕과 이기심을 드러내며 자본주의를 찬미하는 막돼먹은 사람이 아니라, 입만 벌리면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그 비인간성을 지적하는, 그래서 많은 인민들에게서 양식을 가진 사람들로 여겨지는 사람들이다. (112쪽)

세상을 바꾸려면 내 밖의 적과 싸우는 동시에 내 안의 적과도 싸워야 한다. 내 밖의 적과 싸우는 일을 '혁명'이라 하고 내안의 적과 싸우는 일은 '영성'이라 할 때, 역사 속에서 혁명과 영성의 편향은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20세기 '영성 없는 혁명'에 바져들었던 수많은 투사들은 제 영성의 빈곤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결과로 정반대의 편항에, '혁명 없는 영성'에 빠져들어 있다. 그들은 '적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밖의 적은 허상일 뿐이다!' 라고 외친다.
그러나 밖의 적에 의해 삶을 위협받고 내 안을 도무지 들여다볼 삶의 여유가 없는 수 많은 인민들에게 그건 허상일려야 허상일 수 없다.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이지 않을 수 없고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이지 않을 수 없다. 기도든 명상이든, 하루에 30분도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않는 혁명가가 만들 새로운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을 도외시하는 영성가가 얻을 수 있는 건 제 심리적 평온뿐이다.  (123쪽)

가난한 사람은 남보다 적게 가짐으로써 모든 사람이 고루 갖게 하는 훌륭한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으며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라는 예수의 말은 그러므로 당연한 이치다.  (210쪽)

예수의 모습은 우리에게 비범한 사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는 비범한 사람은 두가지 유형이 있다. 전사와 도사. 그러나 예수는 우리에게 본디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비범한 상태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무쇠처럼 강한 전사는 무쇠처럼 무디어질 것이다. 사람 여럿을 죽이고도 편안히 밥을 먹는 강한 전사들이 이룰 수 있는 세상은 인간이 아닌 무쇠덩어리로 가득한 세상일 것이다.
공포와 번민을 낳는 '색의 세계'를 뛰어 넘은 경지에 이른 도사들에게 우리는 감탄하지만, 더 깊은 경지는 공포와 번민을 그대로 느끼면서 그것을 이겨내는 것이다. 약하고 흔들리는 인간이기에 공포와 번민은 당연하다. 그러나 또한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이기에 그 공포와 번민을 끝내 이겨낼 수 있다. 우리는 가장 인간적일 때 비로소 신적일 수 있으며, 누구나 신적일 수 있다.  (235쪽)




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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