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공화국

독서일지 2008. 9. 1. 00:47

 발레리 줄레조 / 길혜연 역 / 후마니타스 / 2007


쉬는 동안 인천중앙도서관을 오가며 평균 3주에 5권씩 (반납기한 연기를 최대한 할 경우, 대출 가능 최대권수) 환경관련 책들을 섭렵했다. 일부는 눈에 잘 들어오고 활용도가 높은 정보를 담고 있어 열심히 노트하였고, 일부는 부담없이 소설책보듯 슬슬 넘겼으며, 일부는 까다롭고 잘 읽히지 않았다 (마치 래디컬 에콜로지 마냥!).

백수시기를 마무리지어야겠다고 마음먹을 즈음, 환경책만 빌려보는게 지겨워졌다. 머리를 좀 식힐 책을 골랐다. 이놈이다.

나는 지금 아파트에 산다. 서른 넷 되던 4년전에 이사와서 5년째다. 태어나서 아파트에 살아보기는 처음이다.

살아보니 아파트가 매력이 있다. 아니, 대도시에서 생활하는데 여러모로 적합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주거공간이므로, 아파트가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하기 싫어질 정도로 이 생활에 인이 박히고 있다.

아파트 이사와서 제일좋았던 점은 쓰레기 버리기가 아주 편해졌다는 점이다. 상가주택과 빌라에 살았을 때엔, 쓰레기 배출 요일을 맞추어 내놓아야 했고, 혹여 비가 오거나 바람이 세게 불어 내용물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동여매는게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아파트에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비닐봉다리 하나에 한두주일치 재활용쓰레기를 쑤셔놓은다음, 옆 동 모퉁이에 설치된 재활용쓰레기 분리수거함에 나누어 버리면 된다. 언제 어느때던. 수거차량이 실어갈 때까지 관리는 내가 지불한 관리비에서 월급을 가져가시는 경비아저씨가 대행해주시므로.

또하나 좋은점은 어린이 놀이터가 단지내에 있다는 점. 늘 골목길에 주차하는 이웃집 차들때문에 집 밖에 나가놀고싶어하는 아이 내보낼 때마다 노심초사해야했는데, 우리 집이 속해있는 '단지'안엔 적당한 넓이의 공터와 모래밭, 아이들 놀이시설이 설치되어 있어서 아이가 '아빠 나가서 놀다올게요'해도 비교적 안심하고 내보낼 수가 있게 되었다.

아파트의 막강한 강점은, '관리비'시스템이다. 1천 세대가 넘는 세입자들이 매달 관리비를 내면, 그 관리비에 의해 고용된 관리사무소 소속직원들 - 관리소장, 회계담당사무원, 경비, 파트타임 청소원, 보일러/전기기술자 - 이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해준다. 아파트 앞까지 들어오는 마을 버스만 타면, 일단 아파트 단지 입구안으로 들어온다음에는 치안걱정이 없어진다. 한달에 한번씩 방역소독을 해주니, 4년동안 골머리를 썩었던 바퀴벌레와의 전쟁에서도 쉽게 해방되었다. 빌라  집주인 시절, 계단 청소문제 때문에 가끔씩 이웃들 사이 얼굴을 붉히는 경우도 있었는데, 별도의 관리인이 있는 지금은 그런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졌다.

내가 아파트에 적응되어 가는것이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편했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은 '도시형 반생태적 건물'의 전형이 바로 아파트 아닌가. 하지만 어쩌랴. 이미 서울이나 부평의 경우 주거형태의 50%이상이 아파트로 바뀌어 버렸고, 연수구의 경우엔 70-80%는 될 터인데. 불편한 마음이야 있지만 달리 대안이 없었으므로 그저 적응해 살고 있던 즈음에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지은이는 프랑스의 젊은 지리학자다.

90년대 초반 교환연구생으로 한국을 찾은 그는 서울의 대단위 아파트 단지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어느 한국인 학자도 시도하지 않았던 한국의 아파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개시한다.

지리학자로서, 저자는 아파트단지를 서울의 도시경관의 핵심을 이루는 요소로 접근하지만 다양한 이론적 틀과 시각을 도구삼아 '아파트 공화국' 한국을 분석해낸다.

프랑스 파리에도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있기는 하지만, 유럽이나 미국의 도시 중산층 이상은 대부분 아파트보다는 마당이 딸린 개인주택을 선호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가 되어버렸다는 면에서 잘 나타나듯, 아파트는 한국에 독창적인 하나의 '문화현상'인 것이다. 파리의 아파트는 70년대까지 젊은 부부들이 선호했던 주거유형인 적이 있었지만, 그들의 소득이 올라 개인주택으로 대거 이주한 다음에는 슬럼화가 진행되었다. 급기야 2000년대 중반, 파리 폭동의 진원지가 되기까지 했다 - 영화 13구역의 소재가 바로 이게 아니었을까 싶다.

유럽인들이 서울의 아파트를 보고 보이는 반응은 이런식이다. "여기가 서울의 대표적인 슬럼가인가요?", "(반포아파트 단지를 보고 나니) 한국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의 병영국가인지 놀랍기만 하다. 수도서울의 심장부에 이정도 규모의 대단위 군부대 막사가 있다니"

특기할만한 사실은, '아파트'가 처음부터 중산층 또는 상류층으로부터 사랑을 받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60년대와 70년대 초까지, 서울의 상류층은 아파트를 별로 달가와하지 않았다.

70년대말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분양시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고급)아파트는 오늘날과 같은 경제능력과 수준을 상징하는 코드요, 핵심적인 자산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80년대 초중반 5천만원 정도에 40평대 현대아파트를 구입한 이들은 십년 후 4배가 넘게 뛴 시세차익을 보며 서울 상류층의 주류가 된다. 그들은 누구인가?

오랜시간 서울에 체류하며, 다양한 계층과 부류의 한국인들을 인터뷰하며, 또 한국의 현대사와 전통주거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접목하며 역작을 만들어낸 저자의 끈기와 저력이 놀랍다.


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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