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안도서관에 갔다가 오랫만에 김연수 소설을 빌어와 보았다.
잊고 있었는데, 지난 겨울에 창희에게 선물했던 책이었다. 시간이 없어 읽지 못한채 주었고 한달 쯤 후인가 물어봤을때 그, 읽지 못했다고 했다, 소설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던것 같다.
몇 달 지난 지금 비로소 읽어보니, 창희의 취향과 많이 어긋나는 책이었겠구나 싶었다.

주인공은 91년 5월, 이른바 <강경대 정국>을 겪은 이다. 아마도 성대 89학번인 작가의 분신같기도.
역사의 진보와 민중, 민족, 통일 따위. 거대한 이야기들이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모두 짓누르던 시절이었다. 그 역사를 가장 진지하게 살았던 ‘개인’들의 이야기는 대체로 죽음-분신이던 타살이던 진짜 죽음-이었던 시절이었다. ‘개인’이 ‘개인’으로서 의미를 던질 수 있으려면 죽음으로써 역사가 되어야만 했던 역설의 시절.
소설은 그 역설의 시절이 20년 가까이 지난 현재, 역설(逆說)을 뒤집어 개인들의 정설(定說)을 되살려놓는다. 거대담론이 꼭 필요한 이유가 갈수록 절실해지는 오늘, 그 역설을 개인들의 온전한 생활의 역사로 복각하는 작업은 어쩌면, ‘믿음’의 대상이 되어버린 역사에 침을 뱉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 그 불경스러움이 불편한 독자들도 적잖이 있겠다, 싶다.

불경스러움은 이런식이다.
‘80년대 후반, 그리고 90년대 초반까지. 학생운동가들 사이의 연애는 금기였다. 내밀한 사랑의 감정을 키우고 확인하며 주고받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었으므로. 하지만 남성 활동가들 사이, 집창촌을 찾아 함께 여자를 사서 안는 일은 왕왕 용인되는 분위기였다. 그것은 ’집단적‘인 것이었으므로.’
내가 아주 잘 공감할 수 있는 정서. 동지들 사이에 연애를 하는 일은 - 실제로는 다들 호박씨 많이 깠지만 - 결코 권장되지 않았고 종종 문제적 상황이 생기곤 했지만, 나 또한 남자 선배 동기들과 어울려 동인천 역 앞 여관방에서 틀어주는 포르노에 탐닉하며 줄서서 용두질을 했던 기억이 있다.
숭고한 개인들의 집합으로서, 역사발전의 주체로서 민중이 만들어낸 진보의 역사는 계속 비슷한 방식으로 해체된다.

인상적인 첫 장면부터가 그렇다. 주인공은 수십년 묵은 서양 여인의 누드사진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바로 일제말기 동남아로 강제징용갔다 돌아온 주인공의 할아버지의 유품이라는 것이다. 강제징용에 끌려간 조선의 청년과 포르노사진의 대비라.

91년 5월, 쉴틈없이 이어진 죽음의 행렬 - 더구나 성대에는 김귀정 열사가 있었다 -을 겪고난 주인공은 결국 탈진하여 무너지고 만다. 몇 주 후 만난 총학 투쟁국장의 제안. 전대협 방북대표의 방북을 돕기위해 독일로 가라는 지침, 혹은 제안. 이 대목에서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 윤승용-박성희 대표가 생각났다. 아하.. 꼼꼼하게도 기록하고 있구나, 작가는.
하지만 막상 독일에 간 주인공의 일상은 비루하고 지루하다. 막연히 본국의 추가 지침을 하루에 한번 전화통화로 확인하는게 독일에서 주어진 ‘임무’의 전부였다. 명분과 역사라는 대의가 벗겨진 채 알몸인 개인의 초라한 초상.

독일에서 우연히 알게 된 광주출신의 변혁운동가이자 인기 다큐멘터리 감독인 강시우의 이야기 또한 역설적이다. ‘자랑스런’ 건설노동자로 시작하지만 출신은 묘하다. 하필 몰락한 아편제조자의 자손이다. 광주의 진실을 알고 친형같이 지내던 선배의 분신을 눈앞에서 목격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재야인사’, ‘광주의 증언자’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역사의 충격은, 구체적으로는 안기부가 그에게 가한 고문의 후유증은 심각하여 거짓말과 성적인 난행을 일삼는 ‘이중인격자’ 재야인사가 되어버린다.

책은 ‘역사’라는 단단한 껍질 - 그 시절의 우리가 만들어냈던 -을 벗기면 나타나는 개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양상을 배율좋은 돋보기로 흝어내듯 그려낸다.
그리고 어쩌면 역사와 개인의 변증법, 사랑의 실체와 진실에 대해서까지 이야기하지만, 도발적으로 개인을 주목하는 충격요법이 강렬하여 정작 메시지는 잘 포착되지 않는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 시절에 이십대 초반을 보낸 내 또래들이 공감할만한 소품들로 미장센을 풍성하게 하는 성실함도 빠뜨리지 않았다.
필독도서로 읽어댔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권진원이 불렀던 <사랑노래> 따위.

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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