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래 저, 강동혁 역, 알에이치코리아, 2023

한국계미국인 작가 이창래의 장편 소설. 

어려서 도미한 작가라고 하니, 이주한(또는 그가 다시 유학이라도 떠난) 나라의 첫 일년을 돌아보는 자전적 소설인가 했다. 22살 미국인 남성 틸러가 주인공인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작중에 등장하는 수많은 등장인물에 대한 깊이 있는 형상화가 돋보였다. 틸러의 자질을 알아보고 그를 타국(동남아시아 여러나라)으로 이끄는 틸러의 멘토, 퐁이 대표적이다. 홍위병 사태로 어머니를 잃고 가난한 고학생으로 홀로 미국유학을 온 그는, 여러가지 역경을 이겨내고 노력한 끝에 자수성가한 화학자이자 사업가다. 그의 성공의 비결은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저마다의 가능성을 찾아내 돋구어주는 놀라운 친화력과 에너지에 있는데, 그의 이런 매력이 틸러의 잠재력을 찾아내 발현시키는 도화선이 된다. 허나 퐁은 이해할 수 없게도 거액의 돈에 눈이 멀어 틸러를 버리고, 퐁을 아버지처럼 따랐던 틸러는 인간이 양면성에 대한 처절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퐁의 가르침 덕택인지, 그 후 어렵사리 귀국한 틸러는 불우한 처지에 놓인 모자를 만나서 진정한 사랑의 힘에 눈을 뜬다. 총각이 연상의 유부녀/이혼녀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에 흔하고 널렸지만 이건 좀 달랐다. 틸러가 사랑하는 여자 벨의 아홉살 아들 빅터 주니어를 아빠처럼 친구처럼 대하면서 그 스스로도 성장해가는 줄거리가 이어지다니.

노벨문학상 수상의 잠재력을 지녔다는 책날개의 칭송이 과찬이 아니었다. 마르께스를 떠올릴법하게도 쉼없이 쏟아져나오는 수다는, 시끄럽지 않고 물흐르듯 유장하고 아름다운 문장이다. 삶의 비루함과 비애, 반전을 다 맛보게하는 탄탄한 줄거리는 잘은 몰라도 대가의 풍모가 느껴지는 듯 했다.

700쪽에 달하는 긴 소설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유쾌한 독서체험이었다.

 

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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