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제목의 단편을 읽은 기억이 있어서 읽은 책인 줄로 알고 있었다.

중편 <디디의 우산>,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두 편이 묶인 연작소설이다.

<디디의 우산>에서는 세운상가에 대한 묘사가 자세히 나온다.

어쩌면 이토록 세밀한 재현이 가능한가 했더니 작가의 부친이 세운상가에서 일하셨다는 얘길 들었다. 그랬구나, 그렇구나.

별 기대없이 두번째 중편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평론가의 말을 빌면 '혁명에 대한 소설'이란다.

다 읽고서야 깨달았는데 화자가 발화하는 시점이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탄핵을 확정하는 날이었다.

시간 순에 구애받지 않고 저자는 1996년 연세대 항쟁과 남일당 사건, 세월호 사건의 기억을 소환한다.

여성의 시선으로, 비주류와 소수자의 시선으로, 참혹한 절망을 날것으로 드러내며, 그렇다고 주저앉지도 않은 채.

이를테면 이런식이다.

"1996년은 덜 삼킨 덩어리처럼 목구멍 어디엔가 남아있다. 오감이 다 동원된 물리적 기억으로. 페퍼포그와 안개비처럼 공중에서 쏟아지던 최루액 냄새, 굶주림과 목마름, 더위와 습기와 화학약품 부작용으로 문드러진 동기생의 등, 세수 한번과 양치 한번에 대한 끔찍한 갈망, 그리고 "보지는 어떻게 씻었냐 드러운 년들." (172쪽)

충격이었다. 낯선 시선이다.

"악녀 아웃이라고 적힌 팻말을 봤다고 나는 서수경에게 말했다.

'녀'가 빨간색이었다고.

불쾌했겠다고 서수경은 말했다. 나는 불쾌했다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그걸 목격한 사람은 청와대 깊숙이 숨은 대통령이 아니고 그 팻말 앞에 선 나였으니까. 계집(녀)인 나. 악녀 아웃이 지금 그의 언어라면 그것이 그의 도구인데 그의 도구가 방금 여기서 내게 한 일을 그는 알까. 그는 자기처럼 이 자리에 나온 많은 여성들을 왜 보지 않을까. 악녀라고 빨갛게 지칭할 때 '그 사람'의 여성은 그렇게 선명하게 보면서도, 그 팻말 앞에서 나는 이렇게 하지 말라고, 이렇게 말하지 말라고...

우리가 무조건 하나라는 거대하고도 괴로운 착각에 대해서도. (306쪽)

이 괴롭고도 정확한 관점을 나는 제대로 이해하거나 갖춰보지 못했다, 이제껏.

"나는 서수경의 목과 어깨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며 서수경의 호흡으로 문장을 듣고 이야기의 높낮이에 조용히 공명하는 서수경의 낭독에 공명한다. 서수경은 좋은 낭독자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매번 깨닫는다. 지난 세월 내내 서수경은 내게 조금도 지겹지 않은 화자(話者)였으니까. " (278쪽)

아름다운 문장이다. 오랜 세월을 함께 반려로 언어와 일상을 섞어가며 살아온 이에게 이는 최상의 찬사다. 소설속 서수경에게 질투가 느껴질 정도로.

 

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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