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선거라는 절차는 특별히 새로운 교황을 선출할 때나 사용했던 절차였다. 투표는 추기경들처럼 같은 신념을 공유하는 집단 내부에서 만장일치에 도달하기 위해 고안된 하나의 수단이었다. ....... 선거가 처음부터 늘 싸움을 조장하는 기재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합의에 도달하기 우해 도입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72쪽)

 

전후 이어진 몇 년 동안은 대중적 지지를 얻은 정당들이 정치 판도를 지배했다. 정당들은 노동조합, 건강보험, 교육기관 같은 매개 기관들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이루면서 시민 각자의 삶에 아주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공공영역은 대부분 이처럼 조직화된 시민사회의 차지였다. 물론 국가가 여전히 가장 영향력 있으며 새로운 미디어(라디오, TV)의 소유주였지만, 정당들은 법적으로 위임받은 임기, 전파를 타는 시간, 방송에 출연하는 단체들과의 교분 등의 형태로 발언권을 확보했다. 그 결과, 자신이 선택한 정당에 대한 높은 충성도와 예측 가능한 투표 행태로 특징지을 수 있는 매우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75쪽)

 

선거는 정치에서 화석연료라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선거가 민주주의에 엄청난 자극제가 되었다. 석유가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선거는 거대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하는 것이 사실이다. 경제불안, 고삐 풀린 미디어 체제, 요동치며 변화하는 문화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이 시대에 오로지 선거에만 계속 매달리는 것은 민주주의를 거의 생매장하는 것과 다름없다. (84쪽)

 

선거가 도입된 건 무슨 목적에서였을까? 민주주의로 인한 소요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대의 민주주의 통치는 선거에 의해서 선출된 대표들이 그들을 뽑아준 유권자들과 사회적으로 뚜렷하게 구분되며, 또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고귀한 시민들이라는 의식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95쪽)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나는 행정직을 예로 들겠다. 제비뽑기는 민주주의적이며 선거는 과두정치적이다." 스파르타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나라의 구성에는 "과두정치적 요소가 더러 포함되어 있다. 가령 모든 행정직은 선출직이며 제비뽑기에 할당된 직책이라고는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그의 관점으로는 제비뽑기가 훨씬 민주주의적이었다. (98쪽)

 

"선별과 추첨이 혼합될 경우, 전자는 군사 업무처럼 고유한 재능과 역량을 필요로 하는 자리에, 후자는 재판관처럼 상식과 정의, 청렴결백같은 미덕만 갖추면 충분한 자리를 배정하는 데 적합하다. 왜냐하면 정상적으로 형성된 국가에서라면 이와 같은 덕목은 모든 시민에게 공통적이기 때문"이라고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밝혔다. (110쪽)

 

프랑스와 미국의 혁명 지도자들은 제비뽑기에 대해서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엘리트들은 권력을 단념할 경우 엄청난 경제적 특권을 단념해야 했다. 프랑스의 경우 혁명주의자들이 고삐를 쥔 마차에는 여전히 적지 않은 늙은 고집쟁이 귀족들이 타고 있었다.  (116쪽)

 

복잡한 개혁안에 대해 국민투표는 거의 항상 '반대'쪽으로 표가 쏠리는 경향을 보인다. "잘 모르겠거든 싫다고 하라"는 슬로건이 있을 정도다. 국민투표에서는 모든 주민에게 한가지 주제에 대해서 묻되, 거의 아무도 그 주제에 대해서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반면 숙의 민주주의 절차를 밟을 경우에는 참가자가 해당 주제에 대해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는다. 국민투표의 경우 사람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반면 숙의 절차를 통할 땐 합리적이고 양식 있는 견해가 도출된다.  (162쪽)

 

1985년 어니스트 칼렌바크(<에코토피아> 저자)와 마이클 필립스는 미국의 하원을 대표원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하원을 구성하는 435명의 의원을 선거가 아닌 제비봅기로 선발하자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보기에 선거에 100퍼센트 의존하는 현행 제도는 충분한 대표성을 갖지 못할 뿐 아니라 지나치게 부패에 취약하다는 약점을 안고 있었다. 돈의 위력이 너무도 지배적이라는 말이다. 제비봅기라면 이러한 약점을 바로잡을 수 있다.  (172쪽)

 

지도와 위성사진, 구 가지 맵 모두 유용하다. 지도가 여정을 짜는 데에는 훨씬 유용한 반면, 사진은 주변 모습을 훨씬 더 생생하게 보여준다. 민주주의도 똑같은 식이다. .... 오늘날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은 이중대표체제, 즉 선거와 제비뽑기를 결합해 대표성을 강화시켜주는 모델이다. 이 두가지는 각각 장점을 지니고 있다. (201쪽)

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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