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3학년 때 일이다.

여름 방학을 맞아 동아리 1,2학년 후배들과 함께 모꼬지를 갔다. 가장 큰 이벤트는 2학년 후배들 가운데 차기 동아리 회장을 투표로 선출하는 일.

모꼬지가기 며칠 전, 3학년과 2학년들이 모였다. 2학년 회장 후보자는 둘이었는데, 나를 포함한 3학년 선배들은 은근히 남자후배인 A군이 회장이 되기를 바랐다. 여자후배 B도 성실하고 믿음직한 친구였으나, 선배들이 보기엔 A군이 B양보다는 '운동성'에서 앞서보였기 때문이다. 그 회동의 결론, 사상학습 세미나도 집회와 투쟁도 좀더 열심이었던 A군으로 회장을 밀자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신나게 놀고 난 후 드디어 회장을 뽑는 순서가 돌아왔다. 후보 추천을 받았는데 선배들의 기대와는 달리 다수를 차지했던 1학년 후배들은 B양을 압도적으로 추천했다. 선배들의 뜻에 따라 B양은 후보사퇴를 할 거라 생각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투표는 진행되었고 결과는 B양의 당선.

나와 내 동료 3학년들은 당황했다. "이건 결과가 잘못되었다. 애초에 B양은 회장에 뜻이없었다. 선배들의 생각은 A군이 맡아주는 거다." 민주주의 기본원칙을 사그리 짓뭉개는 발언을 3학년들이 했다. A군, B양의 표정은 착잡했고, 1학년 후배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항의했다. 조정을 위해 휴회했다.

'민주주의 기본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여러가지 면을 깊이 생각해서 A군이 차기 회장을 맡는 것이 선배들 모두의 뜻이다. 후배들이 널리 양해를 해달라' 어렵사리 1학년들을 설득하고 재투표를 했다. B양이 사퇴를 했고, A군 단일후보로 찬반투표를 했다. 결과는 당선.

당시의 나는, '절차상의 오류는 인정하지만 큰 틀에서 바라볼때 B군이 우리 동아리 조직의 차기지도자가 되는 것이 절대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 쪽팔리고 후배들 볼 때 불편한 마음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운동이 뭐 애들 장난인가? 운동가의 올바른 지도는 결국 대중을 바른 길로 이끌고야 말리라! 고 그 시절의 나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선거 진상조사결과를 보도를 접했다.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절차상의 문제점은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다소간의 오류로 생각하는 당권파의 관행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터져나온다. 문득, 20년전 여름의 일이 떠올랐다. 그 때 나는 내 행동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지금에서 돌아보니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 경조사라도 있어야 보곤 하는 옛날 후배들을 다시 만나게 되면, 그 때 그 일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더 없이 고결한 목적은 결코 비열한 수단으로 달성될 수 없다. 가치를 추구하는 진보정당운동이나 사회운동은, 수 많은 수단을 동원하는 과정 자체가 곧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과거 내가 몸담았던 그 학생운동조직의 정치적 성향은 현재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그것과 같다. 제도와 절차를 목적보다 한단계 급이 낮은 '수단'으로 치부했던 운동조직의 잘못된 풍토가 여전히 남아있어 보인다.  

 

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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