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이란 삶의 기호화된 체계를 기호화된 체계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다. (140쪽)

상상력은, 예술이 그래야 하듯이, 단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다시 바꿔볼 수 있게 하는 수단일 때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일상적 필요에 부응하는 목수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는 예술이 목수의 일상에서도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170족)

인간의 삶을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다. 소수자의 현명한 선택은 자연의 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을 천천히 낭비하자는 것. 자연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소비하는 현대의 삶을 조절하지 않고는 사람 사는 모순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243쪽)

현실에서 감과 직관을 통해 얻은 경험은 논리적으로 기호화된 지식앞에서 사회적으로 무력하다. 물리에 능통한 사람들(노동자)은 물리학에 능통한 사람들(교수)보다 사회적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그러나 경험적 지식으로 체계화된 몸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이론적 지식으로 무장한 사람을 간단히 무장해제시킬 수 있다. 그 둘 사이(그건 계급과 직업의 편견으로 가득한 아득히 먼 거리다)를 극복하고 그 편차를 없애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학교에 다니면서 배웠어야 할 실제적인 학습의 내용이 아닐까....
 기호화된 이론적 지식을 추구하는 까닭은 원칙을 발견하고 그걸 보편적으로 쉽게 적용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론적 지식 그 자체만을 알고 있다면 쓸모없는 지식의 허울은 늘어가고 그만큼 지식에 대한 회의도 늘어난다. (259쪽)

현대인은 배움에 중독된 동물이다. 배움이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심리적 위안을 얻기 위한 것이거나 무엇을 할 수 없다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무엇인가를 배우지 않으면 불안해 견디지 못한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학습중독증 환자이다. (276쪽)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움을 훌륭한 태도로 받아들인다. 배움의 태도로 어떤 일을 마주한다는 것은 겸손하고 성실한 삶의 자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말은 평생 남의 생각에 의지해 줏대 없이 살겠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때로 겸손한 사람과 비겁한 사람을 구분하는 게 매우 어렵듯이 배우려는 사람의 성실함이 생산의 의지인지 혹은 자신감의 결여인지 구분하기도 어렵다. (282쪽)

본능과 경험과 언어를 분리시키려는 지식 권력은 오랫동안 자연을 야만으로 규정하고 벌레의 본능을 인간의 지식보다 열등한 무엇으로 보았으며 인간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경험을 소수가 독점하는 지식에 비해 열등한 무엇으로 인식한다....
자연의 생태와 본능과 감각과 경험을 덜 분화된 지식의 형태라고 말하기 전에, 전혀 다른 지식의 체계로 보려는 시각은 지식에 대한 새로운 정의라기보다는 하나의 태도이다. 인간의 문명이 만든 지식의 서열화가 가져온 일상적 폭력(인간 서로에 대한 그리고 자연에 대한)에서 벗어날 길은 그것 말고 달리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310~311쪽)

지식의 층위(굳이 우열 혹은 계보를 말하자면)는 학문적 지식, 경험적 지식, 자연적 지식의 순서가 아니라 그 역순으로 말해야 한다. (313쪽)




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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