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2

사람일지 2011. 8. 18. 07:30

나는 아닐거라 생각해왔지만 가정 혹은 가족을 최후의 안식처로 삼고 싶은 간절한 욕구가 내게도 있었다.

오래 세뇌되어온 결과일까. 부부와 가정에 대한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이상적인 이미지란 어쩌면 이런 거 일수도.

#1. 중산층 부부의. 맨 정신으로 돌아온(술 안마시고) 건전한 남편은 귀가 후 바로 샤워를 하고, 현숙한 부인은 단정하게 정리된 침실로 고단한 그이를 이끈다. 아마도 속옷을 입지 않았을 상태로 하늘하늘한 침실가운을 갈아 입은 부부. 아늑한 침실 등만 켜 두고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책을 함께 읽거나, 피곤했던 하루 이야기를 조곤조곤 주고받거나, 그러다 서로의 사랑과 믿음을 확인하는 듯한 몸짓 - 꼭 끌어안거나 하며 그 상태로 함께 잠이든다. 조금 더 젊고 정력적인 버전이라면 다음날 아침, 카메라는 흐트러진 이불과 그 속에 윤곽이 드러나는 이들의 벗은 어깨를 비출테지만, 나는 이미 그 나이는 지났으므로 거기까지 바라진 않는다.

#2. 아니면 뭐 이런 그림이라도 좋겠다, 더 좋겠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늦은 밤, 회사에서 이미 한잔 걸치고 온 스트레스 가득찬 남편. 애들은 미리 재운 속깊은 아내는 버스정류장에서 그이를 기다렸고, 부부는 함께 집앞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잔을 기울인다. 남편, 어쩌면 울지도 모르겠다.

밖에서 쌓였던 울분과 스트레스를 푸는게 허용되는 가족, 허용해주는 품넓은 아내에 대한 환상일터다.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여보세요 날 좀 잠깐 보세요 희망사항이 참 거창하군요, 그런 아내에게 너무 잘 어울리는 그런 남편이 좋더라'하고.

어쨌거나, 그런 환상은 결혼생활 시초부터 지금까지 달성된 적이 없다. 정력이 승했던 신혼 초에는 격하게 화를 내기도 했고 지금보다는 훨씬 더 강한 정도로 집보다는 직장일만 신경쓰고 달렸던 30대 중반까지는 그닥 신경쓰지 않고 살았는데, 요샌 다시 예민해진다. 30대 중반까지 더불어 마시던 술과 난행으로 출구없는 욕구를 해소했다면, 지금은 홀로 마시는 술을 찾는다.

조출로 하루의 노동을 앞당겨 시작하려 서두른 아침, 지나친 감상은 독이다. 이제 그만.

다만, 아침에 깰 때마다 악몽을 꾸는지 소리를 곧잘 지르고, 내 딴에는 장난을 건다고 말을 걸 때마다 그 때마다 화를 내며 하루를 시작하는 다섯살 배기 둘째를 보면, 엄마 아빠의 화가 아이에게 투사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오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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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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