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
말이 이보다 더 잔인해질 수 있을까요. 말로써 생살을 포 뜨는 말.
어떠한 동물도 생명을 잃은 다음에는 고기가 되는 운명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쇠고기나 돼지고기, 닭고기 먹기를 즐겨도 살아 있는 소나 돼지, 닭들마저 고기라고 부르진 않습니다.
그런데 물고기들은 살아 있어도 고기라 부릅니다. 얼마나 잔인한 호칭이며 무자비한 인식입니까. 살이 있는 생명에게 고기라니. 고기란 호칭은 물고기들 또한 살아 있는 생명체란 사실을 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생명 죽이기를 재미삼아 하는 낚시나 사냥 같은 난폭한 취미도 생기는 것이겠지요. (18쪽)

한때 나는 많은 재물을 모으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단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산다 해서 존재가 더 커지고, 부의 획득이 존재를 작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수록 존재는 더 커진다고 믿습니다.
부자가 되어 나누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부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삶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부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얻게 되는 모든 것을 나누어 버릴 때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에는 여전히 먹을 것 없고 입을 옷 없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기아와 빈곤은 물질의 부족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더 많이 나누기 위해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모아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역설적이지만 모두가 가난해지려고 노력할 때 이 세계의 모든 가난은 끝나게 될 것입니다. (127쪽)


후로꾸 채식주의자인 나는 물고기는 먹는다.
물.고.기. 는 먹는다, 고 말해왔다. 그러다 강제윤 시인의 물고기에 대한 글을 보았다.
망치로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그렇구나.

얼마나 섬세한 마음결을 갖추고 평화로 향하는 삶을 살기에 이런 글들이 나오는 것일까, 싶다.
작년에 본 <모래 군의 열두달> 이래 가장 아름다운 책이다.

나, 근본적 - radical? - 인 것을 추구하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가만 돌이켜보면 하나도 그렇지 않다.
작가에 대한 선호도 그렇다. 이오덕 선생님과 안건모 작은책 발행인, 배다리사는 최종규씨까지, 우리말을 바로쓰기의 전도사들을 만나며 큰 울림을 얻었지만 왠지 죄의식을 갖게 만드는 회초리같은 문장들이 불편했다. 그러다 래디컬과 현실타협의 중간쯤에서, 래디컬을 존중하지만 나름 멋스러운 고종석을 알게 되었다. 편했다. 에이, 죄의식까지나.

오래전 읽었던 글, "문명과 세계가 지속가능하게 유지되려면 허용될 수 있는 과학기술은 자전거 수준에서 통제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젊은 연인들은 왜 목이 잘린 꽃을 선물하는가, 더운 손을 잡고 들로 산으로 나가서 꽃을 만나라". 무릎을 치며 김종철 교수의 자발적 팬이 되었다. 녹색평론이나 일간지 칼럼 따위에서 간간히 읽게 되는 선명한 문제제기도 늘 신선했다. 그런데 좀 불편했다. 그러다 최성각 시인을 작년에 알게 되었다. 편했다.

강제윤은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그런데 딴은 불편하지 않다. 그의 글을 따라 읽어가다보면, 서서히 무장해제되는 듯하다. 소리 높여 주장하거나 날선 비판을 하지 않는다. 그가 살아가는 만큼을 글에서 보여주는 진실성 때문에, 그 살아가는 일의 높은 격조 때문에 그에게 빠져들게 된다.

그가 부럽다.
홀로, 개와 염소를 키우며, 목수일을 배우며, 농사를 지으며,
그것들 마저도 '가지는 일'이라서
섬을 걷는 그가.
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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