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읽었던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에 '세계 5대 자서전'에 속한다는 평을 보기도 했고, 그 철학과 다양한 양상에 대한 관심도 계속 커져서 두께가 만만치 않았지만 손에 든 책이다. 훌륭한 책이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을 살아가며 인류의 운명과 행복을 위해 생을 걸고 분투했던 인물들이 모두 그렇겠지만, 크로포트킨이란 문제적 인간에게서 우선 돋보이는 미덕은 열정과 높은 도덕성이다. 상당한 수준의 철학자 혹은 사상가이기도 한 다른 혁명가들과는 달리 크로포트킨은 본격적으로 혁명운동에 뛰어든 30대 이전까지 '상당한 수준의 지리학자'였다. 자연과학자였다. 이미 20대의 젊은 나이에 동시베리아 산맥과 북유럽의 피오르드 지형, 빙하에 대한 연구로 일가를 이루었던 그는 그러나 '러시아 지리학회 사무국장'이라는 직함을 사양한다.

이 당시 그의 생각은 이랬다.

'한번이라도 이런 과학적 창조의 기쁨을 맛본 사람은 평생 그것을 잊지 못할 것이다. 다시 이 기쁨을 맛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중한 행복을 극소수만 누리고 있다면? 배고픈 사람들이 진흙같은 한 조각 빵 때문에 투쟁하는 때에, 고상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어떻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민중은 알고 싶어 하고, 배우고 싶어하며 배울 수 있다. 기회와 방법과 시간만 주어진다면 자신의 지식을 확장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
말로만 인류의 진보를 역설하는 진보주의자들, 농민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체 하며 실은 농민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그들은 자신의 모순을 감추는데 급급하여 궤변만 늘어놓고 있다. (208쪽)


크로포트킨은 러시아의 부유한 귀족집안의 자제로 태어나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사상을 형성하는 시기에 민중들과 함께 생활하고 과학을 연구하며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게 된다.
맑스, 레닌을 비롯해 노동자들 속에서 투쟁하고 조직을 만들며 혁명운동을 수행한 당시의 혁명가들은 많지만, 이 점에서 크로포트킨은 다른 궤적을 밟아나가게 된다. 중앙집권적 지도조직의 존재와 규율, 위로부터 아래를 향하는 지도로는 인민을 움직이고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그는 몸으로 체득해나간다.

시베리아에서 지내면서 다른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교훈을 얻었다. 행정기구는 절대로 민중을 위해 유용하게 사용될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문서에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이름 없는 민중의 건설적인 노동이 사회의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또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원주민들과 생활하며 문명의 영향력이 없이도 복잡한 사회 조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주의 집에서 자란 나는 많은 청년들처럼 지휘와 명령과 질책과 징벌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살아왔다그러나 나는 명령과 규율에 따라 행동하는 것과 상호이해를 원칙으로 행동하는 것의 차이점을 깨닫게 되었다. 전자는 군대에서 열병하는 것에는 효과가 컸으나 실생활에서는 별 쓸모가 없었다. 목적은 많은 사람들이 뜻을 한데 모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일 때만이 실현될 수 있었다. ... 어떤 작업이든 계획하고 사전에 착수하는 사람은 필요하지만, 일하는 단계에서는 군대식 명령이 아닌 공동의 이해에 기초해서 진행되어야 한다.  (290쪽)



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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