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읽었던 우석훈의 책들 가운데, 아니 최근에 읽었던 책들 전체를 놓고서도
가장 참신하고 흥미로왔다. '88만원세대'의 후속편에 해당하는 이 책의 제목은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다.
제목을 보자면, 20대들이여, (국가를 진짜로 뒤집었던 선배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조용히 '혁명'을 하자.. 는 거다.

그가 20대 들에게 권하는 혁명이란 예를 들어 <모던 타임즈>를 만든 찰리채플린 처럼 살아가고, 그처럼 영원히 남을 수 있는 무언인가를 만드는 일이다. 신자유주의를 뼈속깊이 내면화한 탓에 뼈속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꿈을 현실에서 만들어갈 수 있는 길은, 여전히 연대의 힘이다. 그가 오늘의 젊은 벗들에게 권하는 연대란 "친구, 안녕"이라고 다정히 말을 건네며 고립을 극복하는 노력이다.

굳이 혁명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그 말이 주는 역동적 힘 때문이란다. 왠지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 말에 숨겨진 기이한 매력과 폭발적인 힘이 한국의 20대에게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란다. 혁명을 통해 만들고 싶은 세계는 배고프지 않고, 외롭지 않고, 잔인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충분히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며 사는 소박한 삶이란다.
그런 소박한 삶을 되찾기 위해, 오늘 우리는 '혁명'을 꿈구고 조용히 실행해야 한다.

20대, 혁명의 예비군이 되어야 할 젊은 세대가 활력을 되찾는 일은 운동의 생존이 달린 중요한 문제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 문장은 20대가 듣기에는 매우 불친절하거나 불쾌한 뉘앙스를 담고 있다. 20대가 혁명의 예비군이 될지 말지는 그들 자신이 선택할 문제이며, 운동의 생존을 위해 20대가 활력을 되찾아야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곧, 이런 식의 관점은 20대를 혁명운동의 수단으로 간주하거나, 은연중에 '대상화'하는 고리타분함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고리타분한 건, 감동을 주지 못하고 외면당할 뿐이다.

요즘 유행하는 용어로는 '대중 주체의 관점'이라고 표현하거나 '당사자운동'이라고 말해야 하리라. 20대의 활력을 되찾는 일을. 그것은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획득하는 것 그 자체의 문제이며, 40대인 내가, 선배 세대인 내가 취해야 할 관점은 대상화하거나, 섣부르게 지도하거나 조직하려 하기보다는 선배답게 구는 태도일 것이다.
가르치기보다는 지혜를 나누고 함께 찾아가려는 진정성을 보태는 것, 그것으로 연대하는 것 말이다.

'88만원 세대'라는 조어가 대박을 내며, N세대, X세대 따위로는 결코 담을 수 없는, 신자유주의 시대 20대들이 처한, 끔찍한 사회경제적 처지를 적확하게 드러낸 우석훈. 그는 이 책에서 꼰대 부리지 않으며, 성급하게 가르치려고 하지 않으면서 당사자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혁명적인 활로를 모색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내가 가진 낡은 사고의 관습이 가진 문제점을 돌아보게 되었다.
진취적이고 공동체적이며 적극적인 우리세대와는 달리, 요즘 아이들은 나약하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학생운동이 될리가 없다거나.
학내 조직의 괴멸을 타개하는 최선의 대책으로, 외부의 지원과 지도를 최 우선으로 생각하거나, 하는 관점을.

책을 보며 그은 밑줄 모음.

80년대에는 이런 롤모델 전략이 먹혔다. 레닌을 이상형으로 삼은 똘아이도, 맑스처럼 공부하고 싶다는 정신 나간 넘도, 로자처럼 뜨겁게 살겠다는 희한한 여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대학생들에게는 이런 롤모델 전략이 잘 먹히지 않는다. "우석훈은 엄친아, 장하준은 원조 엄친아". (그들에게) 이 엄친아 리스트는 계속 갱신되고 있다. - '모델'을 접하는 행위는 일종의 문화소비에 가깝다는 의미에서.  (57쪽)

'간지'를 목숨처럼 여기는 20대들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명랑함. 이들이 이명박이 싫다고 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으로 관심을 돌릴까? 그럴 리 없다. 그들에게 간지는 취향이 아니라 존재 이유다. 불의는 참아도 추한 것은 참지 못하는 독특한 감성. 이들속에서 혁명은 서서히 시작되고 있다. 레닌같은 지도자도 없고 68혁명 때의 세기적 사명감도 없지만, '아름다움'을 가슴에 간직한 대학생들 속에서 서서히. (71쪽)

386들의 리더십도 수직적 리더십에 가깝다. '민주집중제'다. "모두 함께 결정하고, 결정된 것은 반드시 지킨다"는 소비에트가 작동되던 방식이 이들이 이해하는 리더십형태다. 이것은 매우 강력한 엘리트들이 전체를 효율적으로 돌아보고 유연하게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시스템이다. 생각이 바뀌어서 다른 행위를 하면 곧장 배신으로 간주될 위험을 품고 있다. 이런 형태의 리더십은 풀어야 할 문제가 단 하나일때 - 민주대 반민주, 반 2MB처럼 - 는 대단히 효율적이나, 문제가 복잡하고 문제 자체가 급격하게 진화하는 다원적 구조 안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 반독재라는 단 하나의 문제만을 가지고 있던 87년의 전사들이, 90년대 이후 인권,생태,젠터와 같은 새로운 문제들이 부각된 시대에 잘 적응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20대는 민주주의도 잘 모른다고 하나,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가능성이 높다. 20대들이 50대와 다르고 또 40대와도 다른 소통과 의사 결정 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어쩌면 한국에서 전혀 다른 유형의 리더십 혹은 소통 방식의 등장을 위한 사회적 실험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89~91쪽)

(촛불에는 나섰지만 등록금 투쟁에는 무관심했던) 대학생들 태도에 많은 이가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20대가 포위되어 있고, 자기들의 진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았던 것 같다. 80년대는 용감했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 설마.80년대에는 계엄령을 뚫고 나갈 진이 이미 있었고, 지금은 그러한 진이 사라진 이후다. (97쪽)

성공회대같은 일부 학교를 빼면 시민단체의 영향력이 미치는 대학은 거의 없다. 그보다는 8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활동하는 여러 민중단체들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 그런데 이런 단체들은 대학생들을 자신들의 편 정도로만 여기지, 독자적으로 사유하고 결정할 수 있는 별도의 집단으로는 잘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이런 단체의 영향을 받은 총학생회는 지금 대학생 문화와 자연스럽게 결합하지 못해 대학안에서 섬처럼 떨어져 있고, 학생회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다른 학생들에게 마치 화석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139쪽)



 

'독서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0) 2010.02.17
<늑대>, 전성태  (0) 2010.02.17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최영미  (0) 2010.02.05
<나쁜 피>, 김이설  (0) 2010.02.05
<순례자의 책>, 김이경  (0) 2010.02.03
Posted by 나무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