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읽는 일은 적잖은 쾌락을 느끼게 해준다.
사회과학에 편중된 독서 와중에 가끔씩 역사책을 읽으려 하는 건, 그런 때문이다. 맛에 이르기에는 솔찮은 수고가 동반되지만, 그 맛이 꽤 짜릿하고 담백하여 둔감해진 미각을 되살려주는 효과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 선택 역시 편협했으나, 최신의 한국현대사와 필수로 읽어 제낀 세계경제사외에는 이렇다할 독서가 없었던 이력을 반성하며 만난 것이 에릭 홉스봄이었다. 대단한 충격이었다.
자본주의의 발흥 - 노자 대립 - 공상적사회주의 이론의 탄생 - 정통 ML 혁명운동과 (개량으로 귀결된)비주류 혁명운동의 분화 - 제국주의의 탄생 - 소련혁명 - 세계대전 - 냉전. 거칠게 정리하면 근현대 세계혁명사는 이렇게 되는데, 이런 단순한 공식을 세상을 바라보는 프리즘으로 삼기에는 터무니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비주류 혁명운동으로 관심이 옮아갔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쟁>을 읽었다. 소비에트의 실체 -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므로 - 에 근접했고, 우상은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트로츠키 3부작>,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은 레닌-스탈린으로 이어지는 정통 소비에트 혁명사가 의도적으로 배제한, 또다른 눈부신 혁명의 역사가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유럽사에 더욱 관심이 가게 되었다. <스페인 내전>과 <지중해의 역사>를 다음 구매목표 0순위 책으로 올려 놓다.

역사에 대한 새삼스런 관심은 외부에서 들어온 자극 탓인데, MB의 미친 짓거리와 역사공부에 대한 강조 분위기가 있었다. 도식적이거나 현실에 대한 설명력이 빈약한 수십년된 이론틀이 아닌 다른 종류의 시각을 갖고 싶었다.
지단달, 도서관에서 마르크 블로크를 빌렸다가 읽지 않고 그냥 반납했다.
이번엔 국내 저자가 쓴 '해제'격인 책을 빌었다. 프랑스역사학 - 아날학파 - 에 정통한 전공분야 교수 김응종씨가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일관된 방향성을 가지고 집필한 솜씨가 뛰어난 책이다. 그의 깊이에 찬사를.

브로델은 아날학파의 대부다. 정통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과는 다른 관점을 견지하며, 지리학-인류학과 역사연구가 친화성이 높은 프랑스 학문의 전통을 이어 지리적 조건의 규정성 : 구조의 결정적 역할을 강조한다. 구조를 강조한 다음, 역사의  반복적이며 독특한 흐름을 설명하는 개념으로서 '콩종튀르(국면)'을 설파하고, 그 두가지 전제를 방대한 양으로 설명한 후 마지막으로 사건과 개인들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이다. 구조 - 국면 - 사건(개인)의 흐름으로 브로델은 '지중해의 역사'와 '전자본주의 시대 경제사' 전체를 설명한다. 엄청난 시도다. 이른바 '전체사'다.

가장 독특하게 다가왔던 브로델의 이론은 자본주의의 기원을 '생산'이 아닌 '유통'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또 시장경제는 원래 경쟁을 속성으로 가지며, 자본주의는 원래 독점을 속성으로 가진다고 그는 설명한다. 즉, 자본주의가 일정한 발전단계에 이르러 독점자본주의로 전환한다는 레닌의 이론을 정통으로 반박하게 된다. 경제이론가가 아닌 브로델은 무궁무진한 사례와 근거를 들어 이런 설명에 이른다고 한다.

제대로 공부하려는 자, 제대로 살려는자, 모든 우상과 도그마를 거부할진저!!


 

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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