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이 발문을 쓸만한 작가다.

21세기가 20년도 더 지난 이 시점에 80년대 의문사 사건을 주제로

이토록 현실감 있고 밀도 있는, 또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을 수 있다니. 

새벽이 오고 있어요. 창호지를 바른 문살에 희미하게 여명의 빛깔이 스며들어요. 저 검은빛이 깔린 파랑은 분명 희망을 머금은 색이겠지요? 파도 소리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성실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군요. 저 소리가 가까이서 뛰는 당신의 심장 박동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54쪽)

가진 것 없이 맨몸뚱어리 하나로 임금을 벌어서 고향 가족까지 먹여 살리는 이들에게 그들의 권리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배운것들을 나눠 주는 일이 이토록 큰 죄가 되는 세상이라니, 어이 없고 원통하지만 어쩌겠어요. 새 세상이 올 때까지 당신과 내가 조금 더 어둠 속에 웅크릴 수밖에요. 나에게는 당신이 곁에 있어서 이 어둠이 결코 어둡지 않답니다. (96쪽)

일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미약한 힘이나마 보탤 수 있다는 건 어둠의 세상에 태어난 이상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일 겁니다. (98쪽)

 

저자가 인용한 시가 참 아름답다.

파도타기 / 고정희​

둥근 젖무덤에 보름달 떠올라 하룻밤 사무치자 하룻밤 사무치자
팔 벌린 그 밤에 동쪽 샘이 깊은 물에 보름달 주저앉은 그 밤에...

느닷없는 부드러움이 두 가슴을 옥죄이던 그 밤에
깊고 푸른 밤이 불을 켜던 그 밤에
사십도의 강물이 범람하던 그 밤에....

불꽃춤 찬란하던 그 밤에
서해안의 파도소리 하얗게 부서지던 그 밤에
물미역 아름답게 흔들리던 그 밤에
별들이 내려와 드러눕던 그 밤에...

새벽 달빛 호호탕탕 넘어 가던 그 밤에
아아 아홉가지 봉황깃털 창궁에 자욱한 그 밤에
그대와 나 수미산 꼭대기에 떠올라 우주와 교신하던 그 밤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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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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