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욱이랑 단 둘이 지리산에 다녀왔다.

오래 전 부터 꿈꿔왔던 아들과 둘이만 가는 여행이었다.

기대만큼 좋은 시간이었다.

 

상욱이가 제 친구들 담배피우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해주었다. 아빠를 믿는 것 같아 고마웠다.

구례구로 밤기차를 타고 가던 중, 피곤에 지친 상욱이가 제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었다. 이 녀석의 자라남이 온전히 내 몫으로 주어진 역할임을 내 어깨의 촉감이 일깨워주었다. 늘 손을 타야하는 작은 애 뿐만 아니라 큰 애 역시 내 체온을 필요로 하는 이라는 사실을 모처럼 깨달았다. 감동이었다.

팔다리의 근육이 탄탄해진 상욱이가 오르막에선 시종 나를 앞섰다. 앞서 가다가도 10미터 가량 차이가 벌어지면 지긋한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며 기다려주었다. 끼니마다 밥을 앉히고 버너에 불을 피우는 내 옆에서 '아빠 내가 도울 일 알려주세요' 이야기하던 모습은 또 얼마나 믿음직스러웠는지.

 

이 아이가 내게 얼마나 눈물겹게 소중하고 아름다운 선물인지, 참 오래 잊고 지냈다.

 

9월 3일 월요일

20:30  집에서 출발

22:20  영등포역 도착. 상욱이는 햄버거와 감자튀김, 나는 캔맥주와 담배로 허기를 달랬다.

22:53  전라선 무궁화호 승차

 

9월 4일 화요일

03:20  구례구역 도착.

03:30  노고단 행 군내버스 승차. 비수기 평일인데도 의외로 등산객이 많아 놀람.

03:40  구례 버스터미널 정차.

04:30  성삼재 도착. 버스가 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퍼붓기 시작. 낮은 기온, 무서운 바람.

         판초우의를 꺼내 상욱에게 입히고, 랜턴을 하나씩 들고 등반 시작.

05:45  노고단 대피소 도착. 라면 두개 끓여 먹는 동안 밥을 앉혀 도시락 취사.

06:30  아침 식사 완료. 장대같이 비가 퍼부어 기다림.

07:00  대피소 매점에서 비옷을 한개 구입. 상욱에게 비옷을 입히고 나는 판초우의를 두르고 산행 개시

09:10  임걸령 도착. 다행히 비는 잦아들어 우의를 벗고 걸을 수는 있었으나 하루종일 바람과 구름속 산행으로 고전.

10:50  삼도봉 도착

12:30  토끼봉 식사. 헬기장 노천 바닥에서 도시락 먹음.

         찬 밤에 그냥부어먹는 찬 카레를 비벼 먹음. 먹는 도중에 또 소나기 쏟아져 그냥 비 맞으며 먹음. 출발하며 비는 그침.

14:40  연하천 대피소 도착.

         다시 장대비. 우리와 함께 움직인 종주산행객 가운데 초등생 중등생 하나씩을 데리고 온 가족이 있었는데, 폭우로 더 이상 진행 포기하고 연하천 산장에 숙박함. 나도 좀 두려웠지만 우린 그냥 강행키로 함.

17:40  벽소령 대피소 도착. 연하천~벽소령 2,5km 구간을 몹시 힘들게 걸어옴. 굵은 빗줄기와 태풍같은 바람을 그대로 맞음. 상욱이가 이 때 꼭 한번 짜증을 내었음.

18:10  저녁식사. 삼겹살 반근 구워 상욱이 주고, 나는 팩소주 한병 마심.

19:00  잠자리에 듬.

        인터넷 예약시점엔 자리에 여유가 많았는데 궂은 날씨 탓인지 거의 빈자리가 없이 사람이 가득했음.

 

9월 5일 수요일

06:00  기상. 날이 갬.

07:00  아침식사.

08:10  출발

10:30  선비샘

12:20  세석대피소 도착. 짜파게티에 찬밥 비벼먹음. 나는 소주 한병 마심.

13:10  하산길 출발. 칠선 계곡길.

15:30  가내소 폭포. 내려오는 길이 워낙 미끄럽고 가파른데다가 곳곳에 태풍으로 뿌리가 뽑혀 넘어간 나무들 탓에 느리게 진행.

17:20  백무동 하산완료.

남원 산내면 중황마을 사는 종환이가 미리 마중을 나와주어, 종환이 집에서 막걸리 반말 나누어 마시고 별구경, 종환이네 새 흙집 구경하고 열두시쯤 잠이 듬.

 

 

 

노고단 대피소 라면 끓이는 중. 얼짱 각도인지 뭔지. 이 녀석은 포즈를 잡으면 내내 저 뚱한 표정이다. 질풍노도의 나이를 살고 있는 중이니, 내가 적응할 일이다. 

 

첫날 아침을 다 먹고 나니 비가 쏟아져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빗줄기가 잦아들어, 상욱이를 앞세워 등반을 시작했다. 구름속의 산책이다. 

 

우리가 걸은 숲은 하루종일 이렇거나, 

 

이랬다. 절경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하루종일 신선이 된 느낌이었다.

 

노고단 출발 후 첫번째 쉼터, 임걸령에서. 이제 키가 비슷해졌고 등산화 사이즈는 똑같이 270이다. 

 

워낙 깊은 숲길을 걷다보니 곳곳에서 곰을 조심해야 한다. 

 

비가 와서 경치를 보지 못하니 시선은 땅으로만 향했다. 도시에선 보기 힘든 야생화를 실컷 보았다. '투구꽃'이다. 얘가 제일 흐드러지게 피었다.

 

구상나무다. 언뜻보면 주목과 비슷하지만 잎모양이 훨씬 부드럽고 예쁘다. 한라산에 많이 서식하는 놈인데, 지리산에서도 1200미터 내외의 산허리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반가왔다.

 

하양이는 구절초, 분홍이는 산오이풀꽃이다.

 

숙부쟁이.

 

지리산에서 이틀동안 가장 많이 본 사람아닌 동물이 두 종이 있었으니 하나는 이 다리건 거미였고,

 

두번째는 다람쥐였다. 도시근교의 다람쥐는 사람근처엔 얼씬도 안하는데, 이 녀석들은 겁이 없었다. 초코바를 꺼내 먹으니 땅콩냄새 때문이었는지 곧장 달려들 기세도 보였다.

 

꽃나무 보는 여유도 끝이다. 첫날 오후, 연하천대피소. 이 장대비를 고스란히 맞고 벽소령대피소로 갔다. 상욱이가 없었으면 정말 무서웠을 것이다.

 

둘째날은 다행히 날이갰다. 상욱이는 처음으로 본 운해다. 사진을 찍히기도, 찍기도 싫어하던 녀석인데, 시키지 않아도 연신 폰카를 눌러댄다. 구름속만 걸었던 어제라서 경치가 더 눈에 들어왔을 터이다.

 

 

하늘은 시리도록 높푸르렀다.

 

바위틈에 꽃을 피운이가 대견스럽다.

 

제석봉과 천왕봉. 6km여를 앞두고 정상을 포기하고 내려왔다. 애초에 계획한 것도 아니었으니 포기도 아니지만.

 

투정부리지 않았지만 몹시 힘들었을 터이다. 든든하게 점심을 먹고 드디어 하산길에 서 미소짓고 있는 상욱이.

 

내리막길은 칠선계곡길. 유독 심한 지역은 아닐텐데, 곳곳에 지난 태풍으로 숨이 끊긴 나무들이 널려있었다. 나무의 죽음과 고통이 내 심장에도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 상을 치른 슬픔이 채 가시지도 않은 집에 놀러온 셈이 아닌가 싶었다.

 

죽음과 삶은 동전의 양면인가. 무서운 고통과 죽음으로 다가운 물은, 살아남은 이들에겐 생명 그 자체로 주어진다. 계곡을 솟구쳐 흐르는 물줄기가 힘차고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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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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