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이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에서 소개한 일본의 20대 운동을 흥미롭게 읽은것이 오래지 않았고, 직후에 펴든 지행네트워크 刊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닙니다>에서는 그런 우석훈과 일본의 20대 운동을 함께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오호라, 일본의 20대 운동이라, 우석훈이 말하는 - 문화적, 미학적 측면이 강조되는 - 혁명의 샘플, 케이스 스터디를 한번 볼 필요가 있겠구나 싶었다. 지행네트워크 3인의 필자 중 아마도 아나키스트 하승우가 쓴 글에서 였던가, 아예 추천도서까지 있었으니. 바로 이 책, <가난뱅이의 역습>이었다.

평소 마음에 들어하는 타입과는 거리가 먼 책이었지만, 통통거리는 가벼움이 그저 경박스러움에 머물지 않았다. 지은이 마쓰모토 하지메는 1974년 도쿄 출생 남성 활동가다. 그저 활동가-라기보다는, 추천한 이들의 분류법을 따르자면 풀뿌리주민활동가라고 해야 적당하겠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몰락해가던 90년대 중반에 대학에 입학한 지은이는 재학시절, 급격히 보수화되는 대학과 사회를 향해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해 시위를 벌이고, 새로운 지역문화운동을 펼쳐간다.
그게 마쓰모토씨가 고안한 독특한 시위방법을 들여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명동거리에서 크리스마스날 삼겹살 구워먹기 놀이가 네티즌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더니 급기야 TV버라이어티 쇼 프로그램까지 소개된 적이 있다. 나름 신선한 아이디어를 곧잘 내놓는 사무실 황군은, 그 이벤트를 기부와 연결지어보자는 생각을 이야기하기도 했고.
하지만 마쓰모토에게 길거리에서 생선 - 일본에서 이들은 삼겹살 대신 주로 꽁치를 구웠다 - 을 굽는 일은 '문화적인 이벤트'라기보다는 주류사회의 도덕적 위선과 관행, 속이 뻔히들여다보이는 자본주의 상술에 사정없이 똥침을 놓는 일종의 '문화테러'였다.
그의 등쌀에 지친 대학 당국은, 거의 수업을 빼먹었지만 이 골칫덩이에게 졸업장을 '강제로'안겨 7년만에 내몰았지만, 우리의 골치덩이는 졸업장마자 짝짝 찢어발기고 본격적으로 '가난뱅이 계급이 재미있게 살아가기'위한 운동에 돌입한다. 그가 착안한 가난뱅이 계급의 놀이터는 흥미롭게도 재활용가게. 재활용가게는 아무리 매출이 올라가더라도 신제품을 팔아야만 돈을 버는 재벌 배불리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는 재활용가게에서 정(情)과 함께 주고 받는 거래행위 속에서 혁명의 씨앗을 본다.
공무원과 경찰, 재벌기업들을 엿먹이는 일에 신명을 내던 그, 재활용가게를 하며 이웃과의 공동체 형성이 가난뱅이들이 주도하는 혁명에 매우 중요한 단계임을 역설하다가 급기야 2007년에는 지방선거에 출마, '그놈이 그놈'이던 선거판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엄청난 사건을 벌이기도 한다.

재활용가게를 사회적기업의 차원에서 접근한 모델이 아름다운가게이고, 화폐없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나눠쓸 수 있는 경제공동체에 더 비중을 두는 곳이 녹색가게이다. 도쿄 고엔지 지역에서 마쓰모토가 일구고 있는 재활용가게는 가진자들에 대항하는 '문화적 해방구'에 가깝다는 점이 대단히 흥미로왔다.
통쾌한 대목은 선거 행위의 엄숙함을 사정없이 잘근잘근 씹어대고 엿먹이는 마쓰모토들의 발랄 발칙한 선거운동 과정을 묘사한 부분이다. 치밀하게 계산한 득표전략 따위, 반보수 대연합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곱씹어 볼 대목 밑줄.

재활용가게 매상이 아무리 올라간다 해도, 이런 행위는 가난뱅이를 등쳐 먹는 바가지 경제시스템에 조금도 기여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거 대단하지 않은가! 동네 할머니가 "어머, 이거 왜 이렇게 싸"하고 중고 주전자를 사 가는 것이 반체제 행동이 될 수도 있다! 얼씨구! (77쪽)

언제 천재지변이 일어날지 모르고 언제 경제가 와르르 무너질지 모른다. 세상이 공황상태에 빠질 때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지역의 자치는 이루어져야 하고, 아날로그 정보 전달 수단도 유지할 필요가 있다. (88-89쪽)

선거기간 동안만이라도 역 앞을 답답한 규제나 억압을 풀어버린 해방의 공간, 즉 "혁명 후의 세계"로 멋대로 만들자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당연히 동네 토박이나 유지들한테 잘 보이려고 손바닥을 비빌 필요도 없다. 첫새벽부터 역 앞에 나가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잘 다녀오세요" 하며 꼭두각시처럼 인사를 안 해도 된다. 선거기간 동안 하고 싶었던 말이나 실컷 떠들어댈 생각이니까, 어찌 보면 보통선거전과는 다르다.  (145쪽)

호세 대학에 들어갔을 때 운동을 하고 있는 패거리가 꽤 있었어요. 하지만 기껏해야 옛날 전공투의 마지막 패잔병 같은 인상을 풍기는 100명, 200명 수준에 불과했죠. 어렴풋이 그런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도 해봤지만, 나하고는 감각적으로 맞질 않았고 더구나 오늘날 학생들한테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시답잖은 '노숙동호회'가 나한테는 제일 잘 맞았으니까. (186쪽)

우리가 노동운동과 다른 점은, 어떻게 하면 돈을 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느냐를 고민한다는 거죠. 다시 말해 지금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어떻게 탈출하느냐 하는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노동운동은 현존하는 체제 안에서 임금노동으로 살아가는 것을 전제로 삼고 그 속에서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은 대가를 받을까를 궁리하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그런 건 웃기지도 않는 수작이니까 일체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떠들어대죠. (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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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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