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로부터의 수기>, 도스토예프스키, 열린책들

박이문 교수의 독서안내서에 소개된 '고전'. 다른 종류 번역본 제목으로 <지하생활자의 수기>가 있길래, 내 머릿속에 떠오른 책의 스토리는 이런 거였다. 영화 <올드보이> 주인공 마냥, 어떤 연유로 하여 지하실(감옥)에 갖힌 채로 아니면 스스로 선택하여 수십년 세월을 보낸 증언자의 이야기. 이런 설정은 물론 어떤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한 의도된 은유일 것이며, 아마도 책 표지에는 감옥쇠창살, 지하실의 단면도와 함께 실루엣으로 그려진 주인공의 옆모습이 있을 것.. 이라는 상상.

막상 읽은 책은 상상과는 많이 다르게 난해했고, 지긋지긋했다.
타인과 결코 소통할 수 없었던 주인공은, 젊은 날 열심을 부렸던 독서의 결과 만만찮은 지성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책을 너무 읽은 나머지 책과 현실을 종종 혼동한다. 소설의 후반부, 이 비호감의 주인공은 잠시 마음을 나눌뻔 했던 창녀에게 현란한 말솜씨로 인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것을 역설하지만, 그 대사의 많은 부분또한 그가 읽어왔던 책들에서 뽑아낸 문장들이었을 정도니!
난해했던 이유는, 책의 1부가 1860년대 독일과 러시아 지식사회와 지식인들에 대한 에두른 비판 일색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작은 충격하나, 스무살 남짓했던 나이에 읽었던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이 그의 명저의 제목을 이 소설의 제목을 그대로 따다 썼다고 해서 유명해진 그 책. 혁명이라는 불온한 두 글자 단어가 만들어내는 아우라에 휩싸여, 나 또한 그 주인공들처럼 강철같은 혁명전사가 되길 희망하며 읽어댔던 그 책에 대한 통렬한 반박이 바로 이 <지하로부터의 수기>였다.

스무살, 지금 돌아보면 말도 안되는 편견으로 문학작품 조차 좌파적 성격이 강한 책들만 골라서 읽었던 그 때, 체르니셰프스키와 도스토예프스키를 함께 읽었더라면, 내 인생의 시행착오가 조금은 덜 했을까.
적어도, 인간이성의 발전이 완전한 상태에 이르면 이기심조차 이 사회에 유익한 이기심으로 바뀌는 인간형의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한 체르니셰프스키의 가정은, 지금 나 역시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혁명이란, 내 의견 따위 보태줄 틈도 없이 바쁘고 훌륭한 직업적 혁명지도자들이 세워놓은 일정계획표에 따라 오늘의 모진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혁명이란, 모든 권위와 억압하는 질서에 맞선 반동, 억눌리고 소외된 영혼들에 대한 부추김, 메시아와 가장 천한자가 상하 구분없이 나누는 우애, 아니 차라리 메시아 따위를 믿지 않는 능동성, 일상의 전복,.. 따위와 훨씬 근접한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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