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에 몹시 민감한 피부는 백옥같이 고와서 그런 줄만 알았던 적이 있다.
외부의 자극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건 여리고 곱다기보다는 병증에 가까운 거였다.
피부뿐이랴. 타인이 내 마음에 주는 영향은 마음을 둘러싸고 있는 세포막으로
적당히 걸러져 들어와야 정상이다. 그 막이 너무 얇은 건
'투명해'보여 진솔한 맛을 보일 수 있을 진 모르지만
과도한 해석, 뒤따르는 상처로
자신도 괴롭히고 남에게도 부담을 지우게 된다.

말을 오래 더듬었다. 불안함 때문이다. 저이가 나를 이러저렇게 평가하고 규정지어 무리에서 나를 놀림감으로 삼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함.
타인의 관계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종류와는 다른 나 자체에 대해 느끼는 자존감이 생기며
불안함은 조금씩 가시게 되었고, 의사소통과 친구를 만드는 일에 거듭 성공하는 경험이 쌓이며
자연스럽게 말 더듬는 '증상'은 없어지게 되었다., 없어진줄 알았는데 완전히는 아니었지만.

이런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상처받기 쉬운 마음의 상태 운운한다는 거, 그거 제 마음속에 저 밖에 없다는 거 아니냐. 일리 있다. 일리는 있는데, 공식적인 생활부터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까지 온전하게 삶의 모든 순간들을 살아나가는 것은 결국은 '나'이므로, 내가 힘든 마음이라면 무엇보다 우선 그 마음을 잘 지켜볼 일이다.

마흔을 앞두고, 타인과 소통을 하는 언어가 자꾸 더듬거려진다.
내가 자상하거나 착하거나 배려심이 깊거나, 하는 자기암시가 너무 오래된 탓일까, 정말 나는 그런사람이라고 믿으며 대체로 살아가는데. 그건 책임지는 강도가 약한 관계에서만 그런것 같다.
회피할 수 없는 심각하거나 비루한 여러가지 문제들 앞에서
뻔해보이지만 노련함을 요하는 여러가지 상황을 만나서
계속 서투르고 헛발질이다. 편안사람하고는 편하게 지내고
어려운 사람하고는 계속 어렵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며,
결국
내 말들은, 그 말들의 역사가
온통 사기같아진다.
기운이 쭉 빠진다.

운동이라는 건,
내 욕구와 선택보다는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우선이다.
그러나 또 운동이라는 건
내가 사는 일이다. 하루하루를. 몸과 마음, 내가 소유하고 있는 여러가지 물건들과 아끼거나 회피하거나 하는 크고 작은 인간관계를 끼고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이어지는 역사를 운동이라 칭할 것이다.
따라서 머리로만 생각하는 운동이 오래갈 리 없다.
자연스럽고 싶다. 발산의 순간은, 내 안에서 샘물 솟듯 밖으로 에너지가 뻗쳐나오는 순간까지를 기다려야 한다. 규정하거나 배치하거나 자임하는 건, 절반이다.

부처님 말씀에 탐 진 치를 버리라 했던가.
탐심은 그렇다 치고, 어리석음도 알겠는데 뭐 그리 진노할 일이 많을꼬, 했다, 처음 이 말씀을 들었을 땐.

분노와 화를 다스리는 게 중요하겠다, 싶다. 이젠.

고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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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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