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6개월만에 한라산에 다시 올랐다, 정확히는 성판악-관음사 코스를 다시 올랐다.

1월초에 갔을 때엔 발목이 넘게 눈이 쌓인 설산으로 매력적이었는데, 한껏 생명의 기운을 내뿜는 7월의 한라산도 기대만큼 장관이었다.

혼자 올랐다.

한 아홉시간 쯤 혼자 걸으면 여러가지 생각도 정리할 수 있겠지 싶었다.

그렇게 안 되었다.

오를 땐 처음으로 - 차안에서가 아니고 - 가까이에서 본 노루를 비롯해 겨울에는 보지 못했던 많고 많은 이쁜 것들 카메라에 담느라 딴 생각을 못했다.

혼자이고 술을 덜 마셔서 그랬던가 내려올 땐 몸뚱아리가 너무 힘들어 또 딴생각이 안났다.


몇가지 성과.

1. 노루를 네 마리나 직접 보고, 수십마리가 동시에 컹컹대는 소리를 듣다.

2. 떡갈나무 종류가 한라산에도 많이 자란다는 걸 알게되다.

3. 한라산 서쪽 사면 - 성판악 코스 - 에는 소나무 숲이 없다는 걸 알게되다.

4. 삼나무, 조릿대가 얼마나 무섭게 번식하고 있는지 확인하다. 성판악 코스 1000고지 즈음에는 간벌로 벌채된 삼나무 토막이 곳곳에 쌓여 있었다. 관음사길로 내려오는 중 멀리서 푸르른 초원으로 보았던 장구목 아래 사면에 자라는 초목이, 용진각에서 자세히 바라보니 몽땅 조릿대더라. 힘겹게 생명을 지키고 있는 시로미가 안스럽더라.

5. 슬슬 올라가니 성판악 코스는 아직 도전해 볼 만 했다. 아직 몸뚱아리가 그다지 망가지진 않았다는 걸 확인하다.

6. 돈아끼려 관음사에서 제주의료원까지 걸어왔는데 결국 한쪽 무릎이 고장났다. 내 몸이 망가지기 시작했다는 걸 확인하다.

7. 관음사 휴게소에서 막거리 한통이랑 도토리묵 한접시를 9천원에 먹었다. 다음에 시간 계획을 짤 땐 관음사에서 싸게 많이 먹을 수 있다는 걸 고려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경험해 보지 않고는 모른다.


무엇보다 이날 많이 생각했던 것은, 한라산에는 참 이쁘고 귀하고 사랑스런 것들이 참 많다는 사실이었다. 작고 수가 적어 힘이 약하지만 의연히 제 몫의 생명을 피워내고 있는 수많은 존재들은 의당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될 것 같고, 사진을 제대로 찍을 줄 아는 사람은 파인더에 들어오는 뭇 생명들을 결코 함부러 대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

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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