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며 가속화되는 빈곤의 지구화, 그 결과로서 도시빈민의 급증과 참상을 잘 그려낸 책이다. 무엇보다 동아시아에서 남아프리카 끄트머리에 걸쳐 전 세계를 아우르며 제시되는 풍부한 예증이 설득력을 얻는다. 현상을 제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저항주체'의 입장에 선 태도가 빼어나다.
풍부한 예증에는 단연, 집중/집약적 도시화의 속도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서울도 빠지지 않는다. 5장, '불도저도시계획'에서 제시하는 "세계슬럼 퇴거 사건사"를 보면, 1988년에 서울에서 무려 80만명이 퇴거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1950년 이후 제 3세계 국가 전체를 두고서도 이만한 규모는 두번째다. 80만명이라..
지은이가 말하는 <슬럼의 세계화> 동학은 이렇다.
1980년대 이후 제3세계 도시들의 산업화 실패 추세, 동시 경제 퇴보,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의한 각국 정부에 의한 농업 파탄 시도 - 농업에 대한 정부지원 중단 - 농업 몰락, 몰락한 농민의 도시 이주, 무허가 판자촌 인구의 급증.
슬럼, 무허가 판자촌 하면, KBS <달동네>나 MBC <서울의 달>같은 연속극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 내 짝꿍도 간석동 판자촌에 살던 아이였고 무허가는 아니지만 '대안의 공동체'를 시도하는 십정동과 만석동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떠오른다. 90년대 초반 철거투쟁의 추억.
실상은 '추억'할 만한 낭만과 아련한 공동체의 가능성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농촌에서 방출된 사람들은 스쿼팅(Squatting, 빈집(땅) 점거)에 나선다. 스쿼팅이 가능한 곳은 습지, 범람지대, 산사태지대, 쓰레기장, 철도변 등 개발업자조차 외면하는 가장 쓸모없는 땅이다. 그래서 가능하다. 이 땅들은 거주자의 생명과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전지구적 기후변화가 불을 당긴 셈일테지만, 갈수록 자연재해로 인한 수해가 대규모가 되고 양상이 처참해지는 것은 슬럼 확산과 직접 관련이 있다. 1998년 11월 마닐라에서 홍수가 발생해 30만명이 집을 잃었다. 2000년 7월 태풍과 호우로 마닐라 파야타스 슬럼의 '쓰레기산'이 무너져 판잣집 500채가 파묻혀 1천명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로스엔젤레스나 도쿄도 위험요소가 많은 도시지만, 부유하기 떄문에 대규모 공공사업이나 토목공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비용 공공사업을 통한 보호가 불가능한 제3세계 슬럼에 대해서는, 국가는 이들을 그저 '방치'할 뿐이다.
심지어 슬럼에서 빚어지는 잦는 화재는 토지주의 의도적인 방화인 경우가 많은데, 필리핀의 지주들은 들쥐나 고양이를 등유에 적시고 불을 붙여 슬럼에 풀어놓는다. 단, 개는 쓰지 않는다. 너무 빨리 죽기 때문이다.
주민 수천명이 화장실 하나를 공동으로 사용해야 하고 - 하긴, 90년대 초에 주안공단에 들어간 내 선배가 얻은 집은 삭월셋방 10여개가 푸세식 화장실 하나를 써야하는 10만원짜리 였다 - 깨끗한 수도물이 나오는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하루 기본급의 10%를 지불해야 하기도 한다. 깨끗한 물을 얻을 수 없어 피부병에 걸리고, 쉽게 전염병에 노출되고 빨리 죽는다. WHO는 2025년에 500만명의 제3세계 아이들이 물이 없어 예방가능한 질병으로 죽어갈 것이라고 한다.
몇가지 깨달음을, 얻다.
중산층이 급속하게 무너지는 시대, 우리 나라에서도 슬럼의 급증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미래다. 그리고 내 아이를 포함한 부모로부터 집과 재산을 물려받지 못한채 좁은 경쟁의 문을 통과하지 못한 다수의 다음 세대들은, 아마, 슬럼에 살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부터, '살아야 할 지도 모른다'
소말리아의 기아와 내전, 참극이 IMF 구조조정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사례'라고 생각했었다.
몇몇 사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슬럼의 세계화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강제하는 구조화된 모순이다.
프랑스 피에르 신부가 스쿼팅의 선두에 서왔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 나라의 빈민운동과 지도자들도 저 정도의 품위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품위의 문제가 아니라 통찰의 문제다. 우리 안에만 안주하지 않으려는 양심의 크기, 베트남에 사과하고 이라크 파병에 대한 분노를 조직할 수준까지는 이제 이르렀다. 통찰의 수준을 더 높여야 한다. 학살이 어디서 벌어지고 있고, 학살자는 어디에 있는지 통찰하고, 새로운 전투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저항 주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다. 거대 도시화는 돌이킬 수 없는 양상이므로. 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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