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와는 반대로 내가 그의 작품을 어지간히 섭렵했다고 오해하는 작가가 바로 한창훈이다.

진즉 읽었다고 생각했다. 80년 광주를 정면으로 다루는 걸 읽어내기가 힘들것 같아 미뤄뒀었다.

하나의 인물이 어떤 종류의 의미가 있는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의 의미를 설파하는 일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인물의 디테일을 생생하게 살려내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행동의 의미가 무리없이 전해질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온 인물이므로 특정한 상황을 맞닥뜨렸을때 그렇게 행동한 것이 당연하다고 독자가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강희철 평전 작업 때문에 내가 깊이 좌절한 이유 중 하나다. 책에서 결코 성공하거나 시도조차 못했으며, 실은 이제껏 그렇게 글쓰기를 해 본 경험이 단 한도 없다는 뼈아픈 각성 탓이다.)

이 책은 80년에 고등학교 2학년에 다녔던 주인공의 2년간을 다룬다. 1부는 79년, 2부 80년. 남쪽 항구 도시 출신의 주인공 - 아마도 목포가 아닐까 싶다 - 주변에 적지 않은 수의 등장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남고생/여고생/대학생/하숙집 할머니/장애여성/동네 건달/조직폭력배/동네 순경/학교 교사/술집 주인/분식점 아줌마... 등이다. 쓰려고 마음먹었다면야 저자가 아주 자신있게 구사했을 '구수한 남도사투리'를 아예 배제하고도 그 시절의 풍속도가 그대로 그려지는 1부를 마친 후, 이 많은 등장인물이 그대로 2부, 80년 5월의 광주 거리에 다시 등장한다. 해방광주를 만들어냈던 역사의 희생자들, 영웅들이 바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이들이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였으리라. 그 의도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오래 전 광주를 처음 알게되었을때 충격을 받았던 사실 가운데 하나는 유의미한 계급군으로는 전혀 분류될 수 없는 이들이 많이 희생되었다는 거였다. '대학생'이거나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십대 후반~이십대 초반의 청소년 노동자/실업자들이 총을 들고 전선의 맨 선두에 섰다는 사실이었다. 한창훈은 이 장편을 통해 그 순간들을 더없이 생생하게 살려냈다.

뜬금없게도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제일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한판 맞장 떠야할 순간마다 뒤로 물러서는 법 없는 주인공 (그러고보니 얼마전 다시 읽은 <남쪽으로 튀어>의 소년 주인공 '지로'도 그랬다)과는 영 다르게, 매번 결기 없이 우물쭈물 도망가거나 순순히 삥뜯기거나, 그냥 맞거나, 그냥 타협하곤 했던 비겁한 내 소년시절이 자꾸 떠올랐다는 사실이다.



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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