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대 중반에 서귀포에서 1년 반 살았다. 직장관계로,같은 사무실 선배와 둘이. 서귀포시 1청사가 있는 중앙로터리에 일터가 있었고, 서귀포 주당들이 밤마다 모여드는 동문로터리는 걸어서 5분거리에 있었다. 

나만큼이나 술을 즐기는 선배와 일터 근처 여기저기서 많이도 마셨다. 진보정당의 활동가인 우리의 제 1임무는 사람을 사귀고, 모으고 묶는 것. 속 얘기 나누는 은근한 술자리는 언제나 권장되는 분위기였다. 아직 몸은 짱짱하고 주머니는 가벼웠으니 즐겨찾는 1번 단골집은 허름한 실내 포차. 서귀포 동문로터리에 있던 그 집, 지금은 사라졌고 상호도 기억이 안난다. 한라산 소주에 계란말이, 고등어구이 따위를 놓고 새벽이 이슥토록 부지기수로 마셔댔다.

가끔 선배가 오늘은 형이 한번 쏠게! 하는 날이 되거나, 각별히 정성을 다해야 하는 상대를 만날때에는 포차에서 길을 두번 건너면 있는 여러분식당을 찾았다. 정확히는 여러분 산꼼장어.

2007년 옛 모습 그대로인 여러분 산꼼장어. 빛바랜 간판이 정겹다.

제주음식이면 흑돼지, 고등어, 갈치가 제일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 집에서 먹어본 꼼장어 구이는 신세계였다. 꼼장어 구이는 대개 껍질을 완전히 벗기는 식으로 손질해서 구워낸다. 정갈하게 꼬득거리는 맛이 나도록. 그런데 여러분 식당표 꼼장어의 특징. 껍질이 붙어있는 그대로 토막을 쳐서 굽는다는 사실! 싱싱하게 손질된 꼼장어를 숯불에 구워먹는 그 맛은, 놀라웠다. 

세월이 짧지 않게 흘렀지만 나는 그 뒤 제주에 올 일이 있을때마다 이 집을 찾는다. 올해도 6월 중순께, 오랜 친구 재윤 병윤과 같이 2박 3일 여행을 했다. 여러분식당을 다시 들렀다. 미리 전화로 문 여는 시간을 미리 확인하고서 허탕 치는 실수 없게. 재작년이던가 반가운 마음에 그냥 찾아간 이 식당, 주말 저녁인데도 문을 열지 않아 낭패를 본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사장님과 통화를 해보니 손녀 딸냄이를 예정에 없이 오래 돌보는 바람에 그리 되었다고 하셨다. 40대 초중반 짱짱하던 여장부 스타일의 사장님이 이제 할머니가 되셨단다. 허어~

예전에 자주 드나들때에는 먹기에만 바빴지만, 만사에 여유가 생긴 이제는 사장님께 여쭌다. 맛의 비결이 뭐냐고. 여러분 산꼼장어 조리법이 제주 토속 레서피는 아니고, 본인이 직접 배우고 익힌 솜씨라고 하신다. 부산(으로 기억한다)에서 떼어온 싱싱한 꼼장어를 직접 손질해 껍데기채 구워주시니 식감은 다소 거칠게 느껴지나 미각을 자극하는 고소하고 담백한 맛은 배가된다. 

그 시절 이 화덕 앞에서 여러 사람들과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손님이 좀 뜸할때면 사장님도 종종 우리 테이블로 오셔서 세상 사는 얘기, 정치 얘기 무람없이 같이 하시기도 했을 것이다. 제주말이 안되는 육짓것 둘이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서 열심히 떠들며 사는 것 같으니 보기에도 좋지 않으셨을까. 기억에 남지 않으셨을까.

그 뒤로 몇 년에 한번이나 들러도 기억해 주시고, '2007년의 추억'도 잊지 않고 계셔서 감사했다. 이런게 단골의 맛이지. 꼼장어 맛처럼 옛날 그대로인 것도 있지만 세월의 무게를 어쩌지 못해 변해하고 바래가는 것들도 있다, 간판처럼. 그게 또 그대로 좋다. 내가 나이 들어가는 만큼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공간이 조금씩 늙고/편안해지고/여전히 익숙하고/맛은 깊어지고 하는게 좋다. 여러분 산꼼장어가 그런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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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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