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밥벌이의 지겨움2

나무72 2012. 12. 6. 18:43

한달 가까이 고생했던 학교 설계 프로젝트가 오늘로 종료되었다.

처음엔 학교장만 적이라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설계프로젝트가 시작되면 김이사가 기획을, 캐드 선수 최과장이 도면 드로잉을, 나름 숫자에 강한 내가 도면치수에 근거하여 공사비내역서를 작성한다. 이번에도 3주가까이 잔업 철야 특근을 밥먹듯이 한끝에 엑셀 100쪽짜리 내역서를 만들었다. 

변경이 많아서 고생깨나 했다. 큰 작업은 지난주에 어지간히 끝내놓고 납품 하루전인 어젠 편안한 마음으로 마지막 검토를 하던 중이었다. 납품을 하루 앞두고 사단이 터졌다.


관계 공무원께서 갑자기 연락을 주셨다.

"(교실마다 들어가는) 서랍장을 왜 견적처리하셨죠?"

"아~ 싱크대처럼 가구공장에서 만들어오니까요. 현장에서 목수들이 만들수 없어요. 공장에서 만들어야 가격도 저렴하고 내구성도 우수하고, 판재 마무리 마감도 세련되게 나오거든요. 이쁘기도 하고요."

"가격이 더 싸다구요? 설마 그럴리가. 현장에서 만들어야 싸겠죠."

전화를 끊고 1장짜리 비교표를 만들어서 보낸 후 다시 통화했다.

"보셨죠? 현장제작하면 질은 낮은데 오히려 훨씬 비싸집니다."

"그래도 견적처리는 안되니까, 현장제작으로 잡아서 다시 제출하세요"


요샌 학교 특별실 꾸미는 공사가 많다. 아마도 MB의 철학이 반영된 방식일터.

실 하나에 평균 2천만원 정도 들인다. 필수로 들어가는게 가구장. 학교 프로젝트는 입사 후 3년간 10케이스 가량의 공사+설계를 경험했다. 100% 가구장이 들어갔고, 100% 공장제작해서 현장설치하는 방식으로 진행시켰다.


당연하다. 어떤 미친놈이 싱크대를 목수 불러다 집에서 직접 짜겠는가. 

그런 미친놈이 있었던 것이다. 견적처리가 안되니까 현장제작으로 잡으라고. 예산도 오히려 더 많이 소요되는데.


이 관계공무원께서 유독 단가조사를 정확히 했는지 까탈을 부리시길래, 예산절감을 하려고 애쓰는 기특한 공복이라 믿고 싶었다, 내 몸은 피곤했지만. 어제 가만히 보니 진실은 그게 아니었다. 제가 관리를 맡게된 서류에 최대한 꼬투리가 잡히지 않게 일 처리하는 것. 이 분의 최대관심사는 그것이었다. 예산절감, 우수한 품질의 시공이 아니라.


명분도 없고 실익도 없는 업무지시에 대해 정중한 문제제기를 해보았지만 대화가 불가능한 상대였다. 결국 2시간 초과근무를 하고 시키는대로 서류를 다시 꾸몄다. 예산은 수백만원이 늘어났다.



몹시 화가났다. 탁상행정의 전형이다. 보신주의의 화신이다. 제 몸 안다치려고 학교 교직원과 학생 모두에게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방식을 선택했다. 

설계자를 업자=도둑놈으로 바라보는 철저한 불신에도 진절머리가 났다. 업자는 누구나 몇 십 프로 떼어먹으려 한다는 선입관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내가 학교 공사할 때 감리해봐서 아는데, 수성 페인트 2번칠하라고 되어있는데 다들 한번만 대충 칠하시더라구. 그래서 이번엔 아예 칠 규격을 1회 도장으로만 잡고 단가를 깎을거니까, 그렇게 맞춰주세요. 아, 투명락카 도장, 그게 인건비가 2만 얼마라구요? 에이, 도둑놈이시네. 6천원으로 깎아서 책정하세요. 계산 다시해오세요."

이 분 지시대로 시공을 하게 되면, 그 학교 벽면은 수성페인트를 꼭 1번만 칠해야하므로, 칠이 마른다음 뒷벽에 아이들 낙서자국이 그대로 지저분하게 보이게 될 것이다. 시방에는 7회칠, 실재 시공에서도 최소 3-4번은 거듭칠하곤 하는 투명락카 노임을 거의 수성페인트 수준으로 깎아 놓았으니, 그 학교 목재인테리어 벽면은 손을 대면 까실까실한 상태로 될 것이다.


물론, 그리 될리가 없을 것이다. 이 공무원 나리, 분명히 낙찰받은 시공사를 쪼아대며, "에이~ 사장님. 제대로 해주셔야죠. 이번만 공사하고 마실꺼 아니잖아요. 면 잘나오게 잘 칠해주세요." 할게 뻔하다.


이 바닥, 뜨던가, 무감각해지지 않으면, 병이 생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