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지

<꽃 피는 삶에 홀리다>, 손철주 에세이, 생각의 나무 2009

나무72 2011. 9. 17. 07:30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작가. 스테디셀러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를 낸 저자. 산문부터 접하는 게 쉬운 길이다 싶어 선택한 책.
아주 매력있는 작가다. 문장을 자유롭게 쥐락펴락하며 주조해 낸다.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명지휘자처럼 그는 다양한 기술을 동원하여 문장을 맛이 있게 만들줄 안다. 고사와 한시에 대한 깊이 있는 해박한 지식이 먼저 돋보이나 맛깔스러운 건 시어에 가까운 그의 짧고 함축이 많은 단문이다. 자신이 먹물임을 굳이 감추려하지 않으나 진지하고 겸손하다.

반납을 앞두고 밑줄 그은 문장 메모.



아뿔싸, 문 열자 봄이 가고 버들개지가 진다. 구름 가고 구름 와도 산은 다투지 않는데, 봄이 오고 봄이 가면 삶은 이운다. 짧아서 황홀하다.  (5쪽)


모 아니면 도인 세상은 무섭다. 진보냐 보수냐를 두고 목청을 높이는 정치판에서 비진보나 비보수는 맥을 못춘다. 인터넷은 더하다. 안티 아니면 프로다. 중용과 균형은 수상쩍은 대안이 된다. 이 강퍅한 난장에서 모질고 독해지는 것은 언어다. 말에 완곡함이 사라지고 글에서 행간이 증발한다. 말하는 본새와 글 쓰는 품새에 간을 맞추지 않으니 곱씹을 맛도 없다. 음미와 상상이 봉쇄된 말글에서 목도하는 것은 파시즘적 광증이다.  ..............
불문곡직하는 직설은 사람을 찌른다. 깜짝 놀라게 해서 제압하는 방식이다. 거기 배해 완곡함은 뜸을 들이면서 에두른다. 듣고 읽는 이가 비켜갈 틈을 준다. 그렇다고 완곡함이 곡필인 것도 아니다. 잘못된 길로 접어들도록 하는 게 아니라 화자와 독자의 교행이 이루어지는 공간을 준다. 곱씹어볼 말이 사라지고 상상의 여지를 박탈하는 글이 군림하는 세상은 살풍경하다. 말과 글이 세상을 따라갈진대 세상을 갈아엎지 않고 말과 글이 세상과 함께 아름답기는 난망한 일인가. (30~31쪽)


요즘 안부를 물으셨나요
달빛이 깁창에 깃들면 저의 한이 크답니다
꿈길을 걸어가도 만약 발자국이 남는다면
그대 문 앞 돌길이 반쯤 모래가 되었을 겁니다
近來安否問如何 月到紗窓妾恨多
若使夢魂行有跡 門前石路半成沙    (56쪽, 조선여인 옥봉의 시)


꽃이 농염하면 나그네의 귀밑털이 부끄럽고
술은 허름해도 사람 사는 정을 낫게 하네   (72쪽)


저는 빈방에서 꿈을 꿉니다
임이 먼 곳에 계신 걸 잊었고
이별한 마음마저 익숙지 않아
몸 돌려 껴안는데 허공이더이다  (126쪽 청나라 시인 원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