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영화 <죽이러갑니다>

나무72 2011. 6. 7. 23:33


최신영화를 검색하다 어디선가 좋다는 평을 보고 무작정 내려받아 혼자 보았다.
아주 강렬하고 독특한 영화다.
'스릴러가 되고 싶었던 코미디', '웃음과 공포는 한끝차이' 영화포스터에 나오는 홍보문구인데, 내용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다.
스릴러나 액션, 코메디의 중간쯤에 있긴 한 것 같은데 꼭 집어서 특정한 장르영화로 분류하기는 어렵고
영화에 시종 일관하는 강력한 사회풍자메시지를 앞세우긴 뭐하니까 나온 카피이리라.

영화를 본 느낌은 전혀 다르다. 감독이 의도한 바겠으나, 스토리는 상식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코미디가 되지도 않는다. 그걸 웃음이라고 하기엔 영화가 반영하여 보여주는 현실의 이야기가 너무 아프고 무겁기 때문이다.

도입부터 황당하다. 카메라 뷰는 서행으로 공단길을 이동하는 운전자의 시선으로 맞춰져있다. 높고 낮은 공장 지붕들을 흝고 지나가는 사이에 음악이 흐른다. '파업투쟁가'류의 퇴색한 옛노래들이 흘러나오고 투쟁구호 소리와 시끄러운 소음도 함께 들렸던 것 같다.
아무런 설명없이 공장지대를 지나친 카메라는 아마 강남이나 평창동일 듯한 고급 단독주택단지 앞에서 멈춘다. 우리의 주인공이 '죽이러가'는 길에 '죽음을 당할' 일가족이다. 50대 후반즘 되어 보이는 장년의 부부 내외와 부인의 남동생, 부부의 두 자식까지 다섯명이 모처럼 휴가를 가는 길이다. 이 가족은 상당한 부를 가진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이 도착한 목적지는 그날을 위해 임대한 펜션이 아닌, 이들만의 '별장'이라는 점으로 보아 그렇다.

영화 도입부 시선의 주인공이었던 이 영화의 주인공(이경영 분)은 서울서부터 이들 가족을 뒤따른다. 이어지는 스토리는 단순하다. 주인공은 이 가족의 가장인 사장이 운영하는 회사에 다니던 노동자. 비정규직인 그는 해고당한데 앙심을 품고 복수를 하러 이들 가족을 따라온 것이다. 그의 요구는 "진심으로 사과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장은 정리해고는 때로 필요하다고 '진심으로' 확신하는 부류이다. 확신을 고집스럽게 말과 행동으로 실행에 옮기기를 고집하는 부류이기도 하다. 이미 주인공에게 한쪽 팔을 잃은채로 - 손톱으로 썰려서 - 사과를 종용받는 사장. 하지만 그는 가족 모두를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주인공에게 결코 사과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가 해고한 것은 잘못이 아니었다고 진심으로 믿기 때문에.
주인공은 사장 부인의 귀를 자르고, 처남의 발등은 송곳으로 찍었으며 사장 딸의 손가락을 잘랐고 아들의 다리를 잘랐다.

결국, 주인공은 가족 모두를 질식해 죽이려 시도한다. 그러다 등장하는 닭백숙 배달부. 사장이 별장에 도착하기 전 미리 시간을 예약해 주문해 놓았던 닭 백숙을 오토바이에 싣고 배달하러 온 이다. 집에 도착하자 마자 그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차 안에 갇힌채 죽어가던 가족들을 구해낸다.
그러다 이경영이 그를 발견하고 배달부를 죽이려 하는 순간, 사장 아들이 총으로 이경영의 머리를 쏴 죽인다. 총은 사장이 별장에 보관해온 신고하지 않은 '불법무기'였다. 이경영에게 뺐겼던 것을 다시 뺐은 것이다.

이제부터 영화의 후반부. 잠시 혼란에 빠진 사장. 상황을 정리해본다.
'이 사실이 경찰에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어쨌건 내 아들놈이 살인을 저지른거다. 그것도 숨겨왔던 불법무기로. 그렇다면 처벌을 면하기가 어려울거다. 하지만, 저 멍청하게 생긴 배달부가 총을 쐈다고 한다면 우리 가족은 책임이 없어지게 된다. 오호라!'

사장은 생명의 은인 배달부를 다짜고짜 두드려 팬 후 밧줄로 묶은 다음 고문을 가한다.
"네가 저 놈을 총을 쏴서 죽인거라고 불어라!"
"난 그런적 없어요. 살려주세요"
"으악~"
결국 배달부는 고문에 못이겨 사장말대로 자기가 저질렀다고 말하고 만다. 기진해 널부러져있던 그는 사장 딸의 실수로 밧줄을 풀고 이 끔찍한 가족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그를 잡으려 밀치고 밀리고 하던몸싸움 끝에 딸이 죽어버린다. 눈이 뒤집힌 가족들은 칼과 몽둥이 등 온갖 흉기를 휘두르며 달려든다. 
그는 근처 폐쇄된 탄광시설로 도망치고, 그를 죽이려했던 가족들은 오히려 차례로 죽음을 당하게 된다.
결국 다섯명 가족이 모두 죽은 다음, 완전히 넋이 나간 그, 다시 별장으로 돌아가 눈을 부릅뜬채 죽어 있는 이경영의 눈을 감겨준다. 그리고 끝.

스토리 자체만 보자면 황당하기 그지없다. 영화속에서 창조된 인물들의 개성은 워낙 특이하여 작위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며, 별로 웃기지도 않은데 코미디처럼 비현실적으로 사건이 이어진다.  

이제, 이 영화가 코미디가 되기에는 너무 아팠던 대목들에 대한 감상 몇 마디.

1.
생각있는 좌파(?)관객을 당황하게 하는 장면이 초반부터 펼쳐진다. 자본가의 억압과 착취에 맞서는 노동자의 전통적인 무기는 연대투쟁이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노동자는 고전적 정식과는 다른 길을 택한다. 개인적 린치! 그것도 합리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을 간단히 넘어서는 참혹하고 엽기적인 방법으로. 1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우리의 주인공은 사장 가족 다섯명의 신체기관을 하나씩 잘라버린다.
또 당황스런 장면. 원투스트레이트 연타로 정신을 못차리게 하는 당황함은 화면 가득 채운 플래카드에서 이어지게 된다. '800만 비정규직 울고 있다. ***는 각성하라', '비정규직 일치단결 노동해방 앞당기자' 따위의 흘러간 옛 카피들이 다후단지 광목인지 하는 옛날 느낌의 '피씨천'에 조잡한 붓글씨로 써내려제껴 있다. 어디에? 사장가족이 팔과 다리를 잘린채 피를흘리며 갇혀 있는 별장 앞마당에.
영화초입에 흘러나오던 이해할 수 없는 투쟁가와 구호소리에 대한 의문은 비로소 여기서 풀린다. 주인공은 자랑찬 80년대 민주노조운동과 노동해방운동을 계승하여, 800만 비정규직 노동자의 대변자로서 처절한 투쟁에 나선 것이다 - 는 선언을, 주인공이 의도했건 감독이 의도했건 간에, 아프고 얼굴이 화끈거리기에 적당할 만한 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의 아니면 감독의 바람(?)과는 달리 현실은 영화와 정반대다. 800만 비정규직은 물론이고 다수의 정규직 노동자들까지 살인적인 경쟁과 생존투쟁에 내몰리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거나, 그도 아니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퍼부어대는 지긋지긋한 소비주의에 영혼이 병든채 신음하며 살아가야 하는게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할 현실이 아닌가.
평범한 소시민으로 우리 네가족 착하고 성실하게! 만 외치며 살아가던 평범한 가정도 어느날 아침 아버지가 해고되거나, 몇푼되지 않는 돈으로 무리해서 치킨집을 차려봤는데 쫄딱 망해 신용불량자가 되었거나, 신체포기각서를 요구하는 사채업자의 마수에 걸려들거나, 혹은 자살하거나 혹은 묻지마 살인을 저지르거나.. 그렇게 죽어가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사지가 잘리거나, 회사에서 목이 잘리거나 자존심을 짓밟히거나 욕을 먹거나 자식같은 관리자놈에게 치욕스런 처우를 감당해야 하거나, 애새끼 잘난 과외비 벌려 노래방 도우미 나갔다가 누린내 나는 젊은 사내놈에게 젖가슴을 잡혀버리거나, 따위를 당하는 건
연대투쟁의 깃발은 추억속에서 곱개 간직되고 오로지 홀로 자본과 권력의 날선 폭력을 피흘리며 감내해며 살아야 하는 보통 사람들, 보통 노동자,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자, 그들의 착한 아내와 자식들이다.


2.
거의 살인마에 가까운 주인공의 요구사항은 그러나 너무 품위 있고 단순했다.
"너 도대체 왜 우리가족에게 이러는거야, 너 원하는게 뭐야? 솔직히 말해, 난 다 알아, 돈이지? 얼마면 되겠어, 얼마?!"
한쪽 팔이 잘린 채 반쯤 미쳐 지껄이는 사장에게 그가 요구한 것은 단 한가지,
"진심으로 사과하라" 는 거 였다.
너는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사는 사람만이 성공하는 게 세상의 이치라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죽어라고 일해왔지만,
너는 최선을 다해 일한 자들만이 성공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해왔으니, 나는 일한만큼 성공을 기대했으나,
너는 나를 잘라버렸다, 나를 나락으로 밀어떨어뜨렸다. 하지만 내가 그렇다고 실패자인가? 내가 잘못살아온 것인가? 내가 묵묵히 일만 한 죄로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되어 버린것이 오로지 내 잘못이고, 그 비극적인 운명을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건가, 그런식으로 나의 존재 전체를 나 스스로 부정해야 하는 건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 네가 잘못이다. '하면된다'는 신화는 잘못된 것이다. 그걸 네가 시인해라. 그 피해자인 내게 제발 사과해라, 진심으로!
우리의 주인공의 피눈물나는, 그러나 참으로 기품넘치는 요구사항은 대충 이런말이다.

우리를 옥죄는 누군가들에게 혹은 시스템에 대하여 우리의 참된 요구사항도 어쩌면 같은 생각이 아닐까?
'하면 된다고, 세상의 이치는 일등만이 살아남는 세상이므로 열심히 노력하는 길만이 살길이라고
노력해서 일등을 해 볼 생각하지 않고 세상이 어쩌니 떠들어대는 놈들은 다 게으름뱅이거나 빨갱이라고
열심히 일하는 길만이 살길이라고, 빨간날 다 챙겨서 놀겠다는 생각은 도둑놈심뽀라고,
수도권대학에 못 가고, 중소기업에 겨우 취직하고 그러다 집장만도 못하고 장가갈 적기도 놓쳐버리는 인생 낙오자가 되기 싫거든
남보다 더 죽어라고 공부하라고, 일하라고
대체로 패배자로 보이는 당신,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경쟁을 뱅뱅돌려주는 고마운 소비자 - 너의 유통기한이 얼마일지는 모르지만, 과연 네가 얼마동안이나 목숨을 부지한채 소비란 걸 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그러나 나는 거기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는것이,
너 같은 놈들이 죽더라도 뒤에 끝이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을 서 있거든, 너 같은 고마운 그러나 멍청한 고객님들이! -
하여 자동차를 사라고, 하이브리드 일제 신차를 사라고 떠드는 이 예쁜 입술을 좀 보며 느껴보라고
네가 정말 가족을 생각하는 놈이라면 딸러 빚을 져서라도 멋진 아파트를 사라고
열받아서 술마실 거라면 이효리의 탄탄한 허벅지를 떠올리며 처음처럼을 빨아달라고
술취해서 집에 음주운전 하면, 그러다 너 병신되면 병원비 많이 들고 보험료 부담이 커지며,
너 같은 놈들때문에 간신히 먹고 살아가는 대리운전 기사놈들도 있으니, 아차! 이 얘긴 몰래 해야하는데
어쨋건 강성범이건, 이수근이근 생각하며 1588에 일오팔팔 대리운전을 불러달라고
도사는 아니지만 도사 비슷하게 사기치고 사는 이외수 아저씨말처럼 돈 좀 모았으면 놀지말고 키움에서 증권하라고,
이 모든 걸 다 약속하는 카드를 쓰라고,
여름이 다 되어가도록 마라도에 가서 오로지 고객님만을 생각한다고 뻥치시며
하필 기가막히게 아름다운 노래, "You raise me up"을 불러 좀 역겨워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어쨌건
카드를 쓰시려면 신한카드를 쓰라고

라고, 라고 라고 라고 라고!!!!!!!!!!!!111

고만 떠들고, 그만 우리를 괴롭히지 말라는 요구사항,
말이다.
제발 우리를 들들 볶아대지 말고


3.
별장 한켠에 걸려 있는 큼직한 사진관 뽀샵처리 가족사진이 보여주듯, 가족은 대체로 내 성공의 이유가 된다. 비전이 된다. 혹은 끝이 보이지 않는 속도전에 떠밀려 가야하는 이 시대에 가족은 유일한 숨통이 된다. 거의 신화가 된다.
그러나 사장의 가족은 참으로 콩가루 스럽다.
겉으로는 참으로 단란해보인다. 남성적이고 정력적이나 가족들에겐 자애롭고 능력있는 아버지, 영화제작자의 꿈을 꾸는 처남, 정숙한 아내, 인디음악을 들으며 사진찍는 게 취미인 귀여운 막내 딸, 넥타이를 멋지게 맨 사회 초년생 우리집 장남. 기가막힌 조화다.
그러나 목 앞까지 다가온 살인의 위협앞에 이렇듯 단란해보이는 가족은 너무 쉽게 허물어져 버린다.
이 가족의 실상은 이렇게 바뀐다.

다섯명이 뒤로 꽁꽁묶인채 살인자의 협박에 떨고 있는 상황에서도 폭언으로 가족들을 제압하고
설령 누가 죽임을 당하더라도 자기의 권위를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는 마초남 아버지,
누나의 집에 빌붙어 살며 매형의 돈을 훔쳐서라도 최고의 꿈의 산업-영화-에 진출하여 대박을 칠 꿈을 꾸는 처남,
나머지 가족들을 살리겠다고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대문을 걸어잠그는 매정한 아내,
다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음악을 들으며 관음증 환자처럼 카메라 뷰파인더로 모든 피사체를 탐닉할 뿐인, 소통을 포기한 딸내미

자, 이게 니네들의 참 모습이야. 잘 봤어? 왜 그렇게 피붙이 가족에 목을 매며 살아가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소통하지 못하는 가족주의 허상을?

휴, 손이 아프다. 괜히 키보드를 두들기며 내 기분에 취해 흥분했다.
이제 고만 정리.
4.
유일한 생존자인 배달부. 그가 등장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강원도 어디메쯤 깊은 산속 숲길을 100cc 오토바이를 타고 달린다.
뒷칸에 닭백숙 두마리를 싣고, 아주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느릿느릿 급할 것 없이
신록이 가득한 숲의 정취를 한껏 즐기는 기분으로.
그런데 클로즈업되는 그의 행색이 특이하다. 그의 얼굴도 독특하다.

장애인이다. 화상으로 인한 안면장애인 것 같다. 얼굴 절반이 흉이 가득하다.
 - 뒤에 사장이 그를 묶어놓고 고문할 때 '너 얼굴이 이렇게 됐다고 세상에 복수하려는 거 아니냐" 하는 투의, 장애인에 대한 전형적인 편견의 하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
그런데 그가 쓴 모자가 특색있다. '라이더'를 위한 화이바가 아니고, 탄부들이 갱도에 내려갈 때 착용하는 안전모다. 정수리에 플래시가 달려있는 걸 보면 확실히 그렇다. 맨 끝 부분 격투신이 이제는 폐광된 탄광지역의 석탄 처리공장라인인 것을 다시 떠올려본다면, 그는 아마도 원래 탄광 노동자였다가 광산이 문을 닫으며/얼굴에 화상을 입은 때문에 그의 바램과는 달리 더 이상 일을 못하게 된 처지고, 그래서 호구지책으로 닭 배달원으로 일을 하고 있는 사람 아닐까?

롱 테이크인지, 화면은 바뀌었지만 씬이 길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으나
이 장면은 아뭏든 꽤 길다.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가르는 한가운데에 배치된 장면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의미심장했다.

결론적으로, 이 장면은 두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첫째는 두번째 주인공인 이 사람의 정체다. 정규직/노동자=장애인/소수자=비정규직노동자/배달부의 서로 다른 그러나 결국 그 시대의 '민중'으로서의 정체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존재로 설정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다층적인 정체가 감독이 희망을 걸만한 요건이 되는 것이 아닐까.
둘째는 화면이 보여주는, 화면에서 연상되는 가치들이다. 자연, 푸르름, 느림, 웃음, 고독함, 조용함. 새들의 지저귐. 햇빛의 반짝거림.
가장 약하고 줄기차게 빼앗기기만 해온 이가 오히려 가장 아름다운 가치들을 체현하고 있는 역설을, 감독은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러나, 결국 영화는 가장 평범하고 아름다운 약자인 주인공을 가장 무서운 살인마로 둔갑시켜 버리고 끝나고 만다.
어쩌면 영화속 인물들은 현실의 인간군상들의 면모를 고루 보여주는 캐릭터 같다.
우리는 그리고, 결국 그들 중 하나가 아닐까. 억누르거나 억눌리거나,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폭력을 가하거나 장애인이 되거나, 허황된 꿈속에 빠져살거나, 가족의 꿈을 무지르며 강요하거나, 내 안의 나르시시즘에 갇혀 살거나, 새들의 지저귐에도 반응을 하는 민감한 신체로 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