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지

2011년 4월에 읽은 책 네 권

나무72 2011. 4. 23. 23:05

<지리산 행복학교>, 공지영

유명한 지 모른 상태에서 명옥누이에게 선물받은 책을 묵혀두었다 최근에야 손털다.
공지영의 최근 관심사는 잘 몰랐는데, 지리산에 다니며 지냈구나.

어려서 시골 고모님댁에 다니느라 그 산 앞 길을 다녔고
나중엔 현화 선배 때문에 깊이 인상지어져 남아 있는 전주 모악산.
'모악산 시인'이었다가 지리산에 옮겨와 '버들치시인'이 된 박남준과
'낙장불입 시인' 이원규가 지리산에 사는 그의 절친들이다.

지리산에, 1년 연세 50만원만 들고 가면 자리잡고 살수 있단다.

근자에 접했던 도시를 뜨는 이들의 성공적인 정착담 가운데
가장 낭만적이고 유쾌했던 책.
의미부여를 굳이 어렵게 하지않아도, 지르고 살아내다 보면, 또 살 수 있다는 가능성. 보여주다.


<체스이야기, 낯선 여인의 편지>, 스테판 츠바이크, 문학동네
작년에  <광기와 우연의 역사>를 읽은 일은 참으로 강렬한 경험이었다.
그 독일작가의 이름을 계속 기억하고 있었는데
문학동네에서 만들고 김연수 소설가가 직접 번역한 그의 소설이 도서관 신간서가에 등장했다.
대출 0순위, 무조건 빌어 순식간에 책장을 넘겼다.
빼어난 이야기꾼인 스테판 츠바이크는,
행간마다 역사적 맥락을 절묘하게 끼워넣어
독자로 하여금 깊이있는 지적 쾌락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작가다.

<역사가들>, 역사비평사
 "역사학의 지평을 넓힌 12인의 짧은 평전, E.H카에서 하워드진까지"라는 긴 부제를 단 책.
카와 하워드진, 그리고 몇년 전에 읽었던 '안드레 군더 프랑크' 세 명을 빼고는 엮은이의 우려처럼 처음 접해본 역사가들이 아홉이었다. 하여 소개되는 개인마다의 약사도 꼭 눈에 띄는 건 아니었고, 서양사학계에서 그들이 기여한 이론적, 학문적 공헌또한 대개 잘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란 과거의 사실을 단순히 해석하고 서술하는 일이아니라
미래를 위한 방향타를 마련하고자 현재와 치열하게 대결하며,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과거를 체계적으로 동원하는 것이라면, 역사가의 역할은 참으로 소중한 것임을
느끼다.

<빼앗긴 대지의 꿈>, 장 지글러.
장정일이 강추했던 책이다. 김이경이던가.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미국이나 일본과는 다르게 유럽에 대해서는 약간의 환상, 같은 게 있다.
일본이야 한국을 물리적으로 지배하며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안겨주었던 존재고
미국은 철천지원수인 과거, 극복의 대상 그 자체이자 상징인 '자본주의의 첨병국가'로서 현재를 사는 나라니까 그렇다.
하지만 유럽은 다르지 않은가.
미국같은 싸구려 자본주의는 아닐 것이다.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태양과 패션, 낭만의 중심 이탈리아.
관념론 철학과 고전 음악의 메카 독일,
이들을 위시한 유럽 국가들이 구체제를 넘어서 민족주의의 시대를 넘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거대한 실험인 유럽연합의 시도까지.
뭔가 미국이나 일본과는 격이 다르다는 느낌이 있었다.

이게 얼마나 말도 안되는 허상인지, 이 책을 보고 처절하게 깨달았다.
너무 끔찍해서 인용하기조차 어려운 학살과 극악한 폭력을,
프랑스, 독일, 영국과 같은 서유럽 국가들은 주로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
이베리아 반도의 포르투갈, 스페인 두 나라는 주로 중남미 대륙에 대해 저질러왔다.

대개 신(新)-NEW-이라는 형용사는 좋은 어감을 주므로,
같은 식민주의라도 '신'식민주의는 '구'식민주의보다 뭔가 질적으로 나은 체제라는 느낌을 주는데
노골적으로 원색적인 지배를 시도했고 그리하여 과오와 부정의가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던 구 체제가 어쩌면 훨씬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을, 또 알게되었다. 초국적 기업의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또는 총독과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대사'를 통해
프랑스와 영국을 위시한 유럽의 제국들은 오히려 과거보다 훨씬 치밀하고 끔찍하게 남반구 국가들을 착취하고 있다.

지글러는 활력과 양심을 잃어버린 서양에서는 문명의 활력이 소진되었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그는 새로운 희망과 힘은 고통당하는 바로 그 남반구 국가로부터 비롯될 것이라 전망한다.
그 예로 드는 나라가 볼리비아. 억압당한 이들의 정치적 각성과 진출, 경제적 헤게모니의 선취의 전형적 케이스다.

오늘의 세계체제의 본질을 마치 단면도를 보여주듯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고통스런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