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울리히 벡,새물결,1999
'참사랑'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적이 있다.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인가, 그를 위한 것인가?"
"그를 위한 사랑이라면, 그것이 참된 사랑의 본질이라면 아픔은 오로지 내 몫으로, 설령 나와 헤어지더라도 기쁨은 오로지 저 이 몫이 되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한참 후 결혼을 했다. 적은 활동비를 받으며 아르바이트로 분유값을 보태며, 사회단체 간사일을 하며 신혼을 시작했다. 배는 고파도 내 뜻이 높았으므로, 나 자신과 또 내가 선택한 사랑에 대해 자신감이 충만해있었으므로 무서운게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연애시절 나누던 생각처럼 남다른 부부관계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 또한 멋지게 키우고 싶었다. 아버지 뜻을 이을 의로운 아들로 자라기를 바랐다.
1년을 살고 나서, 내가 결혼생활에 대해 세웠던 가정이 모두 허무맹랑한 것이었음을 알 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연애시절과 같은 강도와 느낌의 사랑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것을 꺠달았다. 시간이 더 흐르고 아이가 자라 제 개성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아이 인생의 일대기는 내 맘대로 주조할 수 있는것이 아님을 또 알게 되었다.
깨달아가는 건 있으나 답답함은 여전하다. 노랫말처럼 '사랑과 신뢰로 이루어진 삶'이 최선이라, 나이가 들더라도 그 최선을 지향하며 노력하는 것이 좋은 삶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그 좋은 삶이 일상이 되는 것은 영영 불가능한 것일까. 그렇다면 직장은 그저 돈벌이고 가정은 육아를 위해 내게 주어진 의무를 수행하는 공간인가?
이 책,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은 이런 답답함의 원인을 사회학적으로 탐색한다. 그리고 '사랑, 결혼, 가족, 아이들의 새로운 미래를 향해 근원적인 성찰'(책의 부제)을 시도한다.
주저 <위험사회>로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지은이라니 뜻밖이었다. 사랑과 결혼, 육아도 사회학이 다루는 소재가 되는 건가 싶었다. 그는 말한다. 사랑과 결혼을 둘러싼 갈등과 고통의 원인, 해결방법을 개인적 차원에서 찾는데서 현대인의 비극이 비롯된다는 것을.
자본주의적 사회화는 현대의 인간을 끝없이 '개인화'한다. 교회와 마을공동체에 이어 계급을 거쳐 핵가족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는 공동체를 줄기차게 해체시켜왔다. 노동하는 인간들을 개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본성이다. 회사의 지시에 따라, 운동하는 자본의 생리에 맞추어 그(녀)는 언제든 주거를 이동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일이 폭주하기라도 하면 야근이나 주말, 휴일 특근도 마다하면 안된다.
그런데 이러한 자본주의의 '합리성'은 핵가족의 원리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가족이 유지되는데 안정적인 주거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가족들과 함께 나눌 시간도 늘 일정한 양이 확보되어야 한다. 따라서 20세기 중반까지 그 신화의 최고점에 달했던 핵가족은 영속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여기에 여성의 노동참여는 완전히 다른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
일요일이 다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는 시간이라 그런가, 쓰기 싫다. 그냥 줄친곳 메모.
봉건적 '성별 운명'을 완화, 무효화, 약화 또는 은폐하는 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겠다는 우리의 약속인 것이다. 사랑은 눈이 멀었다. 사랑은 사랑 자체가 야기하는 온갖 고민들의 유일한 탈출구로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통상 사랑 뒤에 현실적 불평등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거부하곤 한다. (p64)
가정과 가사 노동으로부터 여자들을 자유롭게 하려면 남자들은 '이 현대적인 봉건적 존재'에 적응해야 하고, 바로 여자들이 거부하고 있는 바로 그 일을 맡아야 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마치 귀족을 농부의 농노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 (p66)
개인화는 남자와 여자들이 헤어지도록 몰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나 그것은 또한 역설적으로 양쪽을 서로의 품 안으로 다시 밀어 넣고 있기도 하다. 전통이 희미해져 감에 따라 가까운 관계가 갖는 매력은 증대하고 있다. (p73)
결국 가족과 결혼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물질적 안정과 얘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혼자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p74)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건 결혼에 대해서건 개인적 결정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팀작업이었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욕구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개인이 등장하며 변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젊은 시절에 세웠던 거창한 계획들을 회상해내고, 공유된 삶이 만든 타협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이루어지지 못한 것들의 많은 부분은 대개 상대방탓으로 돌려지게 되고, 결혼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희생양이 되어 버린다.(p131)
16년된 결혼생활의 평화로운 행복이 가고 있는 미래이다. 삶은 시금털털하고 걸쭉해져 버린 응고된 우유단지 같고, 당신은 정신은 말짱한 채 그 속에 빠져 있는 파리와 같다. * p176)
부모들은 뭔가 정박할 곳을 찾고 있으며, 세상의 지도가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는 동안 어딘가 속해 있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서 '핏줄을 얻으려고'아이를 가지려 하는 것이다. (p193)
현대적 삶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논리는 외톨이를 전제하고 있다. 시장 경제는 가족, 부모되기, 파트너 관계에 대한 욕구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사적 개인으로서의 삶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노동 시장이 아주 유연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시장을 앞세워 가정 파탄을 조장하고 있는 셈이다. (p252)
독신자가 영위하는 이런 삶의 형태는 사회적 변화의 기묘한 부수효과가 아니다. 그것은 시장 경제가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의 삶의 원형이다. 시장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사회적 결속도 갖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이 논리를 철저하게 받아들일 수록 깊은 우정은 그만큼 더 유지할 수 없게 된다. (p253)
적어도 가끔씩은 사람들이 일할지 말지를 결정하게 하자.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일자리를 위해 가족에 반대되는 결정을 내리도록 강요하는 에움길이 단축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함께 살기를 시도할 수 있는 곳은 마련될 것이다. (p281)
유일한 출구는 산업 사회 전체의 구조를 다시 생각해 만족스러운 사생활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를 고려할 수 있도록 이 구조를 조직하고 성 장벽을 넘어 새로운 균형을 찾는 방법뿐이다."핵가족으로 되돌아가자"거나 "모든 사람이 직업을 갖도록 하자"는 거짓된 대안 대신 제 3의 대안을 (....)
고용사무소는 전체 가족을 위한 직업 상담과 직업 소개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기업과 정부는 가족의 가치에 대해 빈말만 늘어놓지 말고 여러 조직을 포괄하는 협력적 고용 모델을 제공함으로써 실제로 가족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공헌해야 할 것이다 (....)
우정이 부활되어야 한다. 사랑처럼 매혹적이고 위험한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생각을 나누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의도적으로 추구되는, 따라서 더 오래 지속되는 신뢰할 만한 파트너 관계로서의 우정 말이다 (...)
가족을 개방적으로 만들어 가족 구성원들이 홀로 있기를 꿈꿀 수 있게 하는 것, 이와 동시에 정체성 위기와 결혼의 소용돌이보다 오래 갈 수 있는 우정의 망을 키우는 것은 기대가 지나치게 부푼 결혼을 구제하고 이혼의 공황과 혼란을 가라앉힐 수 있는 두가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p282~286)
종교의 경우 모든 에너지는 다른 무한한 현실, 즉 유일하게 참된 현실이자 모든 유한한 삶을 포괄하는 현실로 향한다. 그런데 사랑의 경우 이처럼 모든 일상적 경계선을 열어젖히는 것이 성적 열정 속에서 감각적, 개인적으로 일어날 뿐만 아니라 자신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각 속에서도 일어난다. 각자의 역사/이야기를 드러내는 가운데 연인들은 스스로를 재창조하고, 미래를 새로운 모습으로 그려나간다. 사랑은 두사람을 위한 혁명이다 (...) (따라서) 아무것도 확실하거나 안전하지 않다면, 심지어 오염된 세계에서 숨쉬는 것조차 위험하다면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는 잘못된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 (p301)
사랑은 자본주의 안에 있는 공산주의다. 노랭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주며, 이는 그를 한없이 기쁘게 한다. (p303)
사랑은 낡아빠진 지위 상징이나 돈이나 법률적 고려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실하고 직접적인 느낌에, 이 느낌이 타당하다는 신념에, 그리고 이 느낌이 향해 있는 사람에게 의지한다. 연인들 자신이 입법자이며, 서로에게서 기쁨을 느끼며 자체의 법을 제정한다. (p311)
연인들은 사랑하기로 선택한 사람에 관한 이런 저런 사실을 직시하기보다는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 자체를 사랑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누군가를 이상화하기에 편리하다........ 사랑은 두 사람을 위한 외로움이다. (p326)
사랑은 순풍을 타고 긴 항해에 오른 배이다. 한두번의 폭풍우는 별로 어렵지 않다.
사랑의 매력은 자유, 합의, 만족의 감정을 주는 데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상태가 정반대로 돌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싶어한다. 오직 동의와 자유로운 선택에만 기초한 것이 두 모험가들이 보물을 도둑맞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서로 다툴 때라고 해서 면책 조항을 가진 조건적 자유로 수정될 수는 없는 것이다. (p333)
사랑하는 사람의 완전한 노예화는 사랑을 주는 사람의 사랑을 죽인다...... 따라서 사랑을 주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물건처럼 소유하기를 욕망하지 않는다. 그는 특별한 유형의 전유를 요구한다. 그는 자유를 자유로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p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