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상욱이와 지리산 등반을 마치고 돌아오며

내년엔 설악산에 가자고 약속했다.

약속을 지켰다.

회사에 휴가내고, 상욱이는 체험학습 신청을 하고 1박2일로 설악산에 다녀왔다.

 

설악산 대청봉까지 오르는 코스는 전문 산악인이 아니라면 대개 다음의 4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고 한다.

1. 오색약수터~대청봉 코스

  당일치기 산행 (오르는 시간 4시간 30분 소요)이 가능하다는게 가장 큰 장점이다.

  그러나 시작부터 끝까지 경치를 볼 수 없는 평탄하고 지루한 계곡/육산길을 감당해야 한다.

2. 설악동~비선대~천불동계곡~소청~중청~대청봉 코스

  1박 2일 산행을 할 때 가장 많은 사람들이 택하는 코스다. 크게 어렵지 않으며, 신비로운 계곡과 장엄한 능선길이 고루 섞여 있다.

3. 백담사~희운각대피소~소청~중청~대청봉 코스

  2번 코스보다는 조금 구간거리가 길다. 계곡 경치가 더 뛰어나다고 한다.

4. 한계령~서북능선~중청~대청봉 코스

  시간이 짧다. (5시간) 동서울에서 당일 아침에 버스를 타고 한계령에 내려서 그 날 중청대피소를 목표로 할 때 적합한 코스로 판단했다.

 

사전에 계획할 때에는 4번 코스로 올라서 중청대피소에서 1박 후, 다음날 아침 대청 정상에서 일출을 보고 3번 코스로 내려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4번 코스의 장점은 3번 하산코스의 단점이 되었다. 백담사로 내려올 경우 인천으로 한번에 오는 차편이 없다. 설악동으로 하산하면 속초까지 40분 정도면 닿을 수 있다. 속초에는 인천 직행 고속이 있다. 계획 수정. 4번으로 등반, 2번으로 하산.

국립공원 내 숙박이 가능한 대피소에서 1박을 하는 산행 계획시 관건은 계획한 날에 미리 예약하는데 성공하느냐 하는 것이다.

국립공원 홈페이지에 15일 전에 예약화면이 열리므로 미리 날짜를 셈해서 늦지 않게 인터넷 접수를 해야 하는데, 비수기 평일이라 예약은 어렵지 않았다.

 

시간 순으로 정리해 본 이번 등산의 기록.

 

9월 4일

04:30  기상

  첫날 점심은 취사가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하여, 미리 구입해 둔 초밥재료로 초밥도시락을 쌌다.

  짐을 꾸리고, 아이를 깨워 라면을 함께 먹고 5시 40분쯤 집을 나섰다.

 

06:40  인천터미널 

  시내 버스를 타고 인천터미널에 도착, 동서울 터미널 행 직행 시외버스에 탑승했다. 예매해둔 동서울 발 한계령휴게소 도착 차편은 8시 30분 차. 인천에서 동서울까진 1시간 10분 소요된다니까, 여유있겠지.

 

08:30  동서울터미널 

  출근시간이라 예상보다 조금 늦은 8시 10분에 동서울 터미널 도착. 드디어 출발이다~

 

10:40  한계령 휴게소 도착

  예상 소요시간 2시간 10분을 거의 정확히 맞추어 한계령 휴게소에 닿았다.

  중청대피소까지 예상 산행시간은 5시간 반 가량. 도시락을 싸오긴 했지만 아침이 부실해 여기서 밥을 먹고 가야한다.

  나는 황태해장국, 상욱이는 돈까스를 먹었다. 17000원 내고! 비싸다!

  등산지도를 보면 서북능선을 만나는 삼거리에 샘이 표시되어 있었다. 미리 살펴본 다른 산행 블로그에는 중청까지 샘이 한곳도 없다는 얘기도 본 것 같았다. 좀 불안하긴 했지만, 그 긴거리에 샘이 하나도 없을까 싶어, 집에서 챙겨온 500밀리 짜리 물통 3개 중 2개만 채웠다. 짐을 최대한 줄이는게 체력을 비축하는 길이므로! 그러나, 샘이 정말 하나도 없어 그 결정을 금새 후회하게 될 줄, 그 땐 알 수 없었다.

출발하기전, 내키지 않아하는 상욱이를 꼬드겨 사진 한장 찍었다.

 

 

11:25  출발

 드디어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번갈아가며 미리 똥도 누고 출발했다.

 작년에 지리산 종주도 문제없이 마쳤던 상욱이, 1년새에 많이 자라기도 했고, 지난 여름 북한산 등산도 펄펄 날며 다녀온 녀석이라 초반 2시간 가량이 힘든코스긴 했지만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뿐만 아니라 이녀석도 운동부족이었다는게 금방 드러나고 말았다. 30분도 안되어 헤매기 시작하는 상욱이.

 

 

물론, 헤매기만 한 건 아니었다. 아름드리 나무를 안고 즐거워하는 시간도 있었다.

 

 참, 산길 초입에 진짜 뱀을 만나기도 했다. 나도 오랫만에 코 앞에서 본지라 놀라기도 했고 미처 카메라를 꺼내 들 틈도 없이 사라져 버려 사진을 찍지는 못했지만. 깊은 산에 들었다는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다.

 

13:25  삼거리 도착

 중간에 자주 쉬기는 했지만, 등산지도에 나온 소요시간 1시간 50분 보다 10분 늦게 1차 목표지점, 삼거리에 도착했다.

 여기부터는 지루한 육산 길을 벗어나 주변경관을 바라보며 상쾌하게 등반을 할 수 있는 서북능선길이 열리는 지점이다.

 준비해온 도시락을 까먹고, 바로 출발했다.

 

 

 

 

작년 지리산에 갔을 때 첫날 (노고단 대피소~벽소령)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빗속 산행이라 시원하기도 했고, 내내 구름속을 걷는 기분이라 들뜨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힘들고 경치를 볼 수 없어 답답했다.

이번엔 다행이 날씨가 너무 좋았다. 아직 경치를 보고 감동할 나이가 아닌 상욱이도, 연이어 펼쳐지는 내설악의 멋진 풍광에 감탄을 연발했다.

물이 모자라 힘들었던 것 말고는 즐거운 산길이었다.

 

16:45  끝청

서북능선길로 중청을 향해 갈때 마지막 '깔딱고개'가 끝청이다. 오늘 산행이 끝이 보이는 순간이다.

지리산이나 설악산처럼 당일치기가 아닌 조금 긴 산행을 할 때 좋은 점은,

함께 산을 오르는 산꾼들과 쉽게 친구가 된다는 거다.

장엄하고 냉정한 대자연 앞에 맨몸으로 만날때, 우리가 얼마나 작고 미약한 인간종인지 저절로 깨닫게 되어서 그런건지 모르겠다.

고된 산길을 나만큼 힘들게 걸어온 저이가 그저 반갑다. 나누고 싶어진다.

나나 상욱이나 사진찍(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함께 찍은 사진이 거의 없는데, 끝청에서 쉬는 동안 우리 부자를 반갑게 맞이해준 다른 분이 뺏다시피 카메라를 들고가서 찍어주셨다. 잘나오기까지 했다!!

 

 

17:20  중청대피소 도착

끝청을 오르고 나서부터는 날듯이 중청대피소까지 달려 금새 도착했다.

상욱이는 숙박예약 확인 후 대여한 모포와 짐을 우리 자리로 정리해두러 가고, 나는 바로 저녁밥을 지었다.

작년에 해본 경험이 있어서 준비는 일사천리였다.

물이 부족한 산 위의 취사를 고려하여, 미리 씻어 말린 쌀 4인분으로 코펠밥을 앉히는 일부터 했다.

2인분은 오늘 저녁, 2인분은 내일 아침거리를 한꺼번에 한 것이다.

저녁을 차리는데, 아침에 한계령휴게소 식당에서 낯을 익혀둔 등산객 한 분이 우리 옆으로 자리를 잡는다.

넉살 좋게 아는 척을 했더니, 혼자 오신 이 분, 인심좋게 얼린 맥주와 위스키 한잔을 나누어 주셨다. 이맛이다.

나도 냉동실에 얼려 준비해 간 돼지불고기를 지지고, 이 분과 소주를 나누어 마셨다.

 

 

'데우지 않고 바로부어먹는 짜장'을 미리 준비해가서, 막 지은 더운밥에 바로 얹어 비벼먹었다.

거의 삼층밥이었지만, 해발 1600미터에서 지어 먹는 밥은 뭐든 맛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배정받은 침상에 올라 앉은 상욱.

저녁을 먹으며 다음날 코스를 옆자리 아저씨와 상의해보았다.

이 분은 천불동 계곡 (3시간 반 코스) 대신 아침에 서둘러 공룡능선 (7시간 반 코스)로 가신단다.

설악산에 오르는 많은 이들의 로망이라 한다. 공룡 등허리처럼 삐죽삐죽 튀어나오고 험하지만, 그만큼 감동도 크다하는 공룡능선.

아침부터 서두르고 내리막길에 속도를 내면 우리도 못탈리는 없을 것 같아 잠시 고민이 되었다.

허나, 끝청부터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 오른쪽 무릎 상태를 생각하면 무리였다. 우리는 그냥 천불동계곡 코스로 가기로 하고, 7시 반쯤 일찍 자리에 들었다. 내일 아침, 일출을 보기 위해.

 

23:30   잠깐 깨다

굉장히 추울줄 알고 걱정했던 숙소는 빈 자리 없이 꽉 채운 사람의 열기로 찜통이 되었다.

작년 지리산 벽소령 대피소에서 묵었을 때엔, 너무 피곤해서 무려 11시간동안 한번도 안깨고 숙면을 취했었는데,

이번엔 도저히 더워서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땀도 식힐 겸, 밤별도 좀 볼 겸, 소변을 보러 잠시 밖에 나왔다 들어갔다.

핸드폰 밖에 없어 사진을 찍지 못했지만, 깊은 밤에 본 바깥풍경은 장관이었다.

하늘을 가득채운 채 쏟아질 것 같은 별빛, 멀리 바닷가로 내려다보이는 속초시내의 전등 불빛, 그리고 슁슁, 귓가를 사정없이 때리는 바람소리까지.

좀 서서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익숙치 않은 어둠과 고독이 무서웠다. 처마와 문틈 사이를 휘돌아가는 바람소리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처럼 들렸다. 들어가 억지로 잠을 청했다.

 

 

 

9월 5일

05:00  기상

미리 알람을 맞춰놓았던 건, 불필요한 일이었다. 대부분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이어서, 너도 나도 일어나 수런거리는 소리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더워서 제대로 잠을 못이루었던 건 상욱이도 마찬가지였다. 새벽에 깨서 한참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좀전에 다시 잠이 든 녀석을 깨워 플래시를 들려 대피소를 나섰다.

 

05:25  대청봉정상도착

몹시 추웠다. 30분을 벌벌 떤 끝에 일출을 보았다. 산정에 올라 일출을 보기는 태어나서 처음 일이었다.

세상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아니, 눈부시진 않았구나. 완전한 밝음에서 어둑한 검은 빛까지, 붉디 붉은 색에서 희고 푸른 색까지, 다양한 색의 향연이 온 하늘을 지배했다. 30분 사이에 색과 빛의 잔치는 시시각각 변하며 보는 우리를 황홀경에 빠뜨렸다.

너무도 아름다워 가슴이 벅차올랐다.

 

 

 

 

 

06:20  아침식사

 저 선경에 계속 들어있고 싶었지만 추위와 허기는 어쩔 수 없었다. 돌아와서 어제 해놓은 밥을 꺼내고 1회용 북어국을 끓여 아침을 먹었다.

지난 밤, 단체 산행을 온 한 무리가 소란을 피웠다. 절대 숙소밖으로 가지고 나가지 못하게 하는 모포를 몰래 술자리로 들고 나가려다 공원관리소 직원의 제지를 받기도 했고, 술 취한 채 큰 소리를 내 여러 사람의 숙면을 방해햐기도 했다. 아침에 밥을 차려 먹고 있는데, 이 사람들이 버리고 간 술병 봉다리가 서너개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화가나고 마음이 아팠다.

 

07:10  출발

 시원한 샘물을 받아가지고 가고 싶었지만, 대피소에 끌어놓은 물은 직접 마실 수 없다하여, 닝닝한 숭늉을 대충끓여 물통에 담아가지고 출발했다.

 

08:30  희운각대피소

 상욱이 또 똥을 누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샘물을 직접 마실 수 없었다.

 한 10여분 앉아서 쉬어가는데 다람쥐와 새들이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주위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흘리고 간 과자 부스러기같은 걸 열심히 먹고 있었다. 내가 마치 디즈니 만화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10:05  양폭대피소

 설악동에는 1시 좀 넘어서 도착할 것이었으므로, 취사가능한 남은 식량인 라면을 여기서 끓여먹을 생각이었다. 아뿔싸! 공사중이었다. 별 수 없이 이날의 아점은 '생라면 부셔먹기'로 때웠다. 주위 경치가 하도 좋아서인가, 먹을만했다. 

여기부터 본격적인 '천불동 계곡' 코스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좁고 깊게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내려온다.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하는 폭포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선계의 경치가 아픈 무릎을 잊게 할 정도였다.

 

 

 

 

 

 

 

12:00  비선대도착

 

 

 여기까지가 선계의 끝이다. 비선대부터는 길도 편해지고, 곳곳에 식당이 등장한다.

 상욱이는 밀키스, 나는 칠성사이다를 한 캔 씩 사서 마셨다.

 

13:00  신흥사

 단청이 아름답다는 얘기를 미리 읽었던 신흥사를 보고 싶었으나, 비선대부터 1시간을 더 걸어온 상욱이는 이제 기진맥진이다. 절집앞에 있는 커피전문점 (이곳까지 진출했다!!)에 상욱이를 집어넣고 레모네이드를 한잔 사주고나서 나 혼자 보고왔다.

풍수에 대한 지식은 전무하지만, 그런 내가봐도 고산명찰이 자리잡은 데를 보면 다 이유가 있다.

천천히 걸으면 1시간 가량 걸리는 소나무숲을 지나고 와서 여기에 자리를 잡으면, 속세를 잊고 부처님의 법을 따라 정진하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겠구나, 싶었다. 

 

 

또 30분 가량을 더 걸어야, 최종 목적지인 설악동에 닿을 수 있었다. 시원한 소나무 숲길이 나는 참 좋았고, 상욱이는 거의 울 지경이었다.

 

 

 

13:30  설악동 소공원

 드디어 모든 산행이 끝났다. 감자전에 막걸리로 간단히 뒤풀이했다. 강원도 막걸리, 먹을만 했다.

 상욱에게도 한잔 권했지만 다행히도, 받지 않았다.

 

 

14:30  시내버스 탑승(7번)

 

 

산길을 빠져나온 버스가 속초시내로 진입하기 직전, 잠깐 동안 해안도로를 달렸다. 시원하게 펼쳐지는 동해바다의 풍경도 좋았고, 아쉬웠다.

 

15:10  속초고속터미널 하차

15:30  고속버스 승차

19:30  인천도착

 

상욱이와 얘기를 많이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일부러 얘기를 지어내거나, 끄집어 내고 싶은 마음까지 들지는 않았다.

아직 제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르는 아이에게 자극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이틀 동안 20킬로미터 가까이 단둘이 길을 걸으며, 힘들 때엔 힘든대로, 상쾌한 내리막길에선 그 기분에 따라

저절로 이야기꽃이 피어났다. 편안하고 차분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그 꽃을 함께 즐긴 시간이었다.

그것으로 족할 수 있을 것 같다.

 

눈부시게 피어나는 상욱의 육체를 확인한 여행이었고, 관리하지 않으면 서서히 망가져가는 신호를 보내는 내 육신을 감각한 여행이었다. 육체는 서서히 고장신호를 보내기 시작했지만, 인간이 아닌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민감해져감을 또한 느낀 여행이었다. 아래는 이틀 동안 눈에 들어왔던 설악산의 꽃들. 나무들.

 

 

 

 

 

 

 

 

 

 

 

 

 

 

 

*  준비물 목록

 

 

(각자)

긴팔 옷, 긴바지, 양말, 수건, 치솔&양치용 소금, 물통 (1L), 수저, 물컵, 휴지, 물티슈, 비닐봉지, 후래쉬, 핸드폰 배터리, 읽을 책, 스틱, 모자,

 

(같이)

- 4, 김치,

- 코펠, 버너, 카메라, 등산지도, 구급약품,

 

(구매)

- 초코바, 비스켓, 소주, 부탄가스1, 건전지 4, 라면2, 3분짜장2, 북어국1, 구이김, 초밥재료,

 

Posted by 나무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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